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보선생 Nov 13. 2020

손님은 오리무중

한국의 가게에서는 손님과의 관계가 복잡 미묘하다

한국의 가게는 손님과의 관계가 복잡 미묘하다. 손님이 어떤 때는 왕이고 어떤 때는 찬밥 신세다. 그런 실정을 자세히 모르는 남편에게는 이 상황이 오리무중일 때가 많다. 황당하거나 재미있는 일도 벌어진다.


우리 부부가 매일 아침 출근하다시피 가는 커피숍에선 왕이 부럽지 않다. 지극한 손님 대접이 황송하다. 친절한 마음에서 향기가 나는 사람들을 존경하는 나는 그런 훌륭한 분들의 황송한 대접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 만족스러운 커피숍과, 그리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그 커피숍에 가는 루틴과 사랑에 빠진 남편은 한동안 코로나 여파에 이 커피숍이 문을 닫지나 않을까 걱정이 컸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대여섯 달 사이 커피숍 주변에 가게가 세 개나 문을 닫았다.  


처음에 이 커피숍에 왔을 때는 미국에서 하던 식대로 화장실에 휴지가 떨어지면 바로 종업원 분들께 알려줬다. 나무로 만들어진 물컵이 새면 재깍 갖다 주면서 이 물컵이 샌다고 알려줬다. 미국에선 이렇게 해주면 주인이나 종업원이 좋아한다. 자기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한 일을 손님이 주인의식을 갖고 도와주니 안 좋아할 수가 없다. 보통 아주 고맙다는 반응이 나온다.


손님이 왕인 이 커피숍에선 물컵이 샌다고 하면 종업원 분들이 미안해한다. 손님이 불편을 겪기 전에 자기들이 미리 알아서 해결해야 했을 일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화들짝 놀라며 죄송하다고 하는 종업원 분들께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도움이 되려고 한 일이 오히려 일하시는 분들에게 스트레스를 준 건가... 고민이 됐다.


눈치도 없이 두세 번 정도 물이 새는 컵을 보고 한 후 어느 날, 커피숍의 물컵 세트가 상당히 비싸 보이는 황동색 놋그릇 컵으로 바뀌어 있었다. 새 황동색 물컵을 소독기에서 꺼내는 우리를 보고 활짝 웃는 종업원분을 보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나니 열 전도가 잘 되는 놋그릇 컵에 뜨거운 물을 받을 때도 손이 뜨겁다는 표시를 낼 수가 없었다. 얼마 후 컵이 다시 나무 컵으로 바뀐 걸 보면 아마 다른 누군가가 컵이 뜨거워진다는 말을 했지 싶다. 그 누군가가 종업원들 중 하나이거나 가족이었기를 바랬다. 적어도 신경 쓰이는 단골손님은 아니었기를 바랬다. 그래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미안한 마음은 안 가졌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다니다 보면 이런 커피숍 같은 곳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선 손님 대접이 오리무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특히 재래시장에선 온갖 다양한 경험을 다 할 수 있다. 예전 글에서도 썼지만 온갖 다채로운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하다.


그저께는 평소 자주 가던 작은 과일 가게가 아닌 큰 길가에 널따란 좌판을 펼쳐둔 큰 과일 가게에서 원하는 과일을 찾았다. 과일을 사려고 주인을 찾아보니 보드라운 담요를 무릎에 덮고 평상 위에 앉으신 아주머니가 따듯한 오후 햇살에 늘어진 고양이처럼 눈을 감고 계셨다. 햇살이 좋으신가 아니면 살짝 잠이 드신 건가 생각하며 무심코 아주머니를 불렀다. 한번 불렀는 데 목소리가 너무 작아 못 들으신 것 같아 한번 더 조금 크게 불렀다.


아주머니가 화들짝 하고 잠에서 깨신 순간, 남편과 내가 잠시 몸이 얼어붙었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다는 말이 이런 때 쓰이는 것인가 보다. 아주머니가 화가 나셨다. 아마 단단히 나신 듯 보였다. 이 달콤하고 소중한 나의 곤한 낮잠을 감히 누가 깨웠냐는 책망의 표정이 얼굴에 한가득하며 한동안 눈을 마주치지 않고 가만히 앉아계셨다.


남편과 내가 혼이 나는 초등학생들처럼 두 손을 얌전히 모으고 앞에 섰다.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올라왔지만 코털이 건드려진 사자 앞에서 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후 아주머니께서 살짝 잠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뭐 줄까?"


순간 나의 용건이 뭔가 사자를 깨울 만큼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대단할 걸 찾길래 나의 이 소중한 낮잠을 방해하느냐 생각하실 것 같은 거다. 그래서 결국 사려고 했던 과일에 다른 것을 하나 더 얹어서 샀다.


과일을 건네받으며 "아주머니 주무시는 데 깨워서 죄송해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아직도 잠을 덜 깬 사자가 괜찮아 괜찮아 하시면서 손을 저었다. 여전히 눈은 안 마주치시면서 말이다. 아니, 그런데 그 와중에도 굳이 귤 몇 개를 더 집어서 봉지에 넣어주시는 건 또 뭔가.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이신가?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로 오리무중일 상황일 테다.  


과일을 받아 들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과 내가 동시에 웃음이 크게 터졌다. 아마 이런 경험은 한국의 재래시장에서만   있을 테다. 이미 남편과 나는 제주 곳곳에서  팔아도 된다는 식의 가게 주인들을 많이 만나온 터지만 그래도 이번 일은 특별하지 않은가. 살면서 황당하면서도 동시에 재미있는 경험을 하기가 흔치 않지 않은가.


가끔 적극적으로 나서서 장사를 안 하려는 듯한 행동을 하는 상인들을 만나면 남편이 아주 신기해한다. 식당에서는 많이 먹는 우리 가족이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주문하면 그럼 다 못 먹는다고 그렇게 많이 시키지 말라 하신다. 식당에서 더 팔려고 노력하지는 않을 망정 더 사겠다는 사람을 나서서 적극적으로 말리신다.


그뿐인가. 한 번은 팁을 드린다는 의미에서 한 식당에서 잔돈을 안 받겠다고 했다가 왜 잔돈을 안 받냐며 주인아주머니께 혼이 난 적도 있다. 당신보다 젊은 부부가 쓸데없이 돈 낭비하는 것처럼 보여서 혼을 내키신 거든지, 아니면 내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아닌 돈은 줘도 싫다는 자부심이 있으신 듯하셨다. 팁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화에서 살던 남편에겐 정말 신선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애초에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 우리 탓이다 싶어 나를 돌아보게 된다.


한국의 가게에선 손님과의 관계가 오리무중이라는 남편의 말이 깊이 공감되는 걸 보니 내가 미국에서 오래 살긴 살았나 보다. 예전 같았으면 익숙했을 광경이 지금은 내 눈에도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내가 변한 게 틀림없다 생각 든다. 보이는 것보다 보는 이의 눈이 중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보배라는데, 살면 살수록 지혜롭고 너그럽고 사랑스러운 눈을 갖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목적 없는 길에서 만나는 즐거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