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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선생 Nov 09. 2020

목적 없는 길에서 만나는 즐거움

오늘 하루, 계획 없이 그냥 한번 훌쩍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여행의  묘미는 즉흥적일   진하게 드러난다. 계획을 꼼꼼히 세워서 가는 여행이 편리하기는 하지만  경험에는 즉흥적으로 그날 그날의 우연적인 흐름을 따라가는 여행에서 기대치 못한 행복과  감동을 만나는 일이 많다.


지난 주말에도 즉흥적으로 떠난 서귀포 여행에서 아이들을 앞세워 어디든  닿는 곳으로 산책을 나섰다. 우연히  제주 올레길 표지판을 발견하여 들어선 길에는 키보다 높이 쌓인 돌담이 양쪽으로 기다랗게 이어져 있었다. 위에 살짝 얹은 약간의 시멘트를 제외하고는  흔한 접착제도 없이 쌓아 올린 돌담 사이를 걸어가는   몸과 마음이 돌담으로 둘러싸인  느낌이 경이롭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했다. 신비로운 돌담 길의 끝에 다다르자 숨멋도록 아름다운 바다 경관이 펼쳐짐과 동시에 깊은 바다만이   있는 묵직한 울림이 있는 파도 소리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남편과 내가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가슴이 터질듯한 벅찬 감동이 올라왔다.


꼭 어디에 가야 한다는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은 만나는 길 하나하나가 새롭다. 애초에 목적지가 없기 때문에 만나는 모든 장소와 인연과 사건이 목적이 된다. 목적지를 정해두고 가는 길은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의 과정이 숙제가 된다. 그럴 땐 길을 잃으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다. 목적지가 없을 때는 길을 잃으면 신이 난다. 키높이 돌담길처럼 기대치 않은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거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숨겨진 보물 같은 맛집이라도 만나는 날에는 그 기쁨이 두 배, 세 배가 된다. 미리 계획했더라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경험이기에 더 소중하고 기쁜 마음이 환하게 올라온다.


유연하지만 다소 대책 없는 나와는 달리 꼼꼼하고 계획적인 남편은 일단 일정을 계획하면 기대를 갖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계획한 일이 틀어지거나 내가 마음을 바꿔 계획했던 일정과 다른 일을 하고 싶어 하면 크게 실망한다. 그런 남편과 즉흥적인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신박한 아이디어를 발견했다. 즉흥적인 여행을 미리 계획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오늘 일정은 즉흥적인 것이다라고 정하고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남편은 그 누구보다 더 열정적이었다. 오히려 나보다 더 즐거워했다. 남편이 즉흥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즉흥적이고자 마음먹는 것이 필요할 뿐이었다. 즉흥적이어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허락을 내리는 것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런 남편을 보며 나 역시 비슷한 면이 있지 않나 하고 돌아보았던 기억이 있다. 나 역시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일이라도 생각만 살짝 달리하면 의외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워싱턴 디씨에서 살던 어느 날이었다. 토요일 아침에 일어났는데 요즘 제주의 날씨처럼 날씨가 눈물 나게 화창했다. 이런 날씨에는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필을 돌렸더니 뾰족한 부분이 서쪽을 가리켰다. 혹시 모르니 여벌 옷 한벌씩만 가방에 던져 넣고 무조건 서쪽으로 향했다. 연필이 그러라고 하지 않았는가. 연필 돌리기는 시험칠 때만 유용한 게 아니다. 살면서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겠을 때는 그냥 연필을 돌리는 게 좋다. 가끔은 생각 많은 나보다 생각 없는 연필이 더 좋은 결정을 내려주기도 하는 탓이다.


그 여행은 출발하는 순간부터 특별했다. 길의 풍경 하나하나가 아주 생생하게 눈에 들어왔다. 평소 같았으면 무심코 지나치게 되는 고속도로의 풍경도 자세히 보게 되었다. 목적지가 없고 여행에서 무엇을 얻겠다는 기대가 아예 없으니 가는 길에 만나는 모든 것이 새롭고 멋지게 느껴졌다. GPS의 지도를 보며 서쪽으로 서쪽으로만 운전해 가다가 앞에 갈림길이 나온다 싶으면 동전을 던졌다. 앞면이 나오면 더 모험적인 샛길로, 뒷면이 나오면 더 안정적인 큰길로 갔다. 그렇게 샛길을 달리던 중 배가 고파져서 주변 식당을 검색했다. 그렇게 들어간 한 작은 식당에서 이제껏 먹어본 중 최고로 맛있는 홈메이드 잉글리쉬 머핀을 만났다. 새로운 단골 브런치 식당이 생겼다.


목적 없이 가다 보면 가끔 늘 가 봐야지 생각만 하던 장소가 떡하니 눈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잉글리쉬 머핀으로 부른 배와 행복해진 마음으로 다시 서쪽을 향해 달리다가 만난 것은 항공우주박물관 도로 표지판이었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대로 따라가 보니 말로만 듣던 어마어마한 크기의 박물관에 디스커버리호를 비롯한 실제 우주선들과 수백여 대의 진짜 비행기가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비행기와 우주선들을 복원하고 보수하는 기술자들의 공방을 내려다보면서 아이들이 신이 났다. 기념품샵에서 산 비행기 장난감 때문에 박물관을 나서는 아이들의 안 그래도 큰 목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거기에 있는 줄도 몰랐는 데 이렇게 우연히 평소에 가고 싶었던 곳을 만날 때 그 기쁨이 아주 크다. 내가 꼭 가봐야지 하고 생각했을 때는 실천하기 힘들었던 일이 생각지도 않았는 데 나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 줘서 고마운 마음이 든다.


서쪽으로 한참을 더 달리니 허허벌판에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돌로 된 집이 하나 보였다. 굳은 다리를 펴고 잠시 쉬어갈 겸 산책 삼아 걸어간 그곳은 알고 보니 메너시스 전투가 열렸던 평야였다고 했다. 남북전쟁 최초의 대규모 전투가 열렸던 장소라 했다.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북군이 이 전투에서 지는 바람에 전쟁이 4년이나 연장되었다고 했다. 너무나도 평범해 보여서 전혀 특별한 줄 모르고 지나칠 뻔했던 그곳에서 엄청난 역사를 발견했다.


아이들이 돌집의 외벽에 박혀있는 대포알을 보고 신이 났다. 아마 관광객들을 위해 나중에 사람들이 시멘트를 발라 붙여둔 것이 분명해 보였지만 아이들에게는 벽에 붙어있는 그 동그란 쇳덩이가 너무 신기했나 보다.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나 보다. 지금은 허허벌판인 그 역사적인 전쟁터에서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하는 전쟁놀이에 푹 빠졌다. 아이들의 그 흔한 손가락 전쟁놀이가 평소보다 훨씬 더 실감 나고 진지하게 느껴졌던 것을 보니 아마 나의 상상력 또한 충분한 자극을 받았던 것 같다.


이쯤에서 이만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계속 서쪽으로 가는 모험을 택할까를 생각하며 동전을 던졌다. 앞면이 나왔으니 계속해서 서쪽으로 가기로 했다. 잠시 후 아름다운 쉐넌도어 국립공원이 나타났다. 혹시 미 동부 워싱턴 디씨나 버지니아 지역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쉐넌도어 국립공원을 꼭 방문하라고 말하고 싶다. 스카이라인 드라이브를 천천히 운전하며 한 여름에도 상큼하리만큼 차갑고 신선한 공기의 느낌을 온몸으로 맞아보라 하고 싶다. 존 덴버의 노래 Country Road를 들으면서 지금은 아마 블루릿지 마운틴에 잠들어 있을 듯한 그의 아름다운 영혼에 인사를 건네라고 하고 싶다. 지천에 흐드러진 야생화와 우거진 풀과 나무 사이를 무심하고 우아하게 걸어 다니는 야생동물들과의 생생한 조우를 즐기러 가라 하고 싶다.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이 멋진 여행은 쉐넌도어 벨리에서 던진 동전이 뒷면이 나오면서 마무리되었다. 계속해서 동전의 앞면만 나왔다면 우리 가족이 몇 주 후에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발견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발견한, 이름이 전혀 한국적이지 않은 한 한국 식당에서 이 지역 최고의 쌈밥 정식을 발견했을 때쯤에는 이런 행운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 완벽하리만큼 조화로운 여행의 끝은 당연히 최고의 행운으로 마무리 지어져야 할 일이었다.


즉흥적으로 떠난 여행에서 우리는 일정을 미리 계획했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것들을 만났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멋진 장소와 인연들을 만났고 늘 가보고 싶었던 곳에 자연스럽고 쉽게 도달했으며 예상치 못했던 신비롭고 경이로운 자연과의 가슴 벅찬 조우에 감동했다. 설사 이 모든 것들을 미리 알고 갔다 하더라도 아마 가는 과정에서 느낀 신선한 즐거움은 덜 했을 것이다. 우연한 발견에서 느끼는 기쁨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가끔 계획 없이 떠나볼 일이다. 기대 없이 그냥 떠나는 길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에서 경이로움을 느껴볼 일이다.


그러고 보니 사는 것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 극적인 변화나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들은 모두 내가 미리 알고 준비했거나 계획했던 것이 아니었다. 악착같이 공부해서 교사가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삼 년 후 내가 미국에 가게 되어서 곧 교직을 그만두게 될지는 몰랐다. 나이 30이 될 때까지 미국 사람과 결혼하여 미국에 살게 되리라고는 꿈에서조차 상상 못 해 봤다. 박사 과정에서 지극히 이론적이고 실험적인 연구를 하던 내가 졸업 후 지극히 실용적이고 실천적인 현장에서 교사를 교육하는 직업을 갖고 그 일에 큰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리라고는 전혀 생각치 못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우리 가족이 이렇게 제주에서 1년 넘게 사는 날이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니 아직 가 보지도 않은 길을 마치 이미 아는 것처럼 미리 다 준비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삶도 즉흥적인 여행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살아가는 길에서 만나는 하나하나의 인연을 소중히 하며 과정을 그저 즐기다 보면 선물 같은 순간들을 만나게 되는 게 아닐까. 계획 없이 그냥 던져지듯 살아도 되는 게 아닐까. 만약 그렇게 살 용기까지는 없다면 여행이라도 그리해 보면 좋을 일이다. 짧은 여행에서라도 우연에 맡기고 가는 여정이 주는 그 생생한 기분을 한번쯤은 느껴볼 일이다. 즉흥적인 여정이 어떤 깜짝 놀랄만한 일을 준비해 두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오늘 하루, 계획 없이 그냥 한번 훌쩍 떠나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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