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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 늘보 Oct 13. 2020

오지랖은 달고나

한국의 재래시장에서 일어난 재미난 에피소드


한국의 재래시장은 사랑스럽다. 대형 마트가 가지지 못한 다채롭고 재미나고 소소한 사랑스러움이 있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이마트나 마트로 같은 큰 슈퍼마켓이 있지만 웬만한 식료품은 조금 더 멀리 위치한 동문 재래시장에서 장을 본다. 재래시장에서는 신선한 야채나 과일을 대형 마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 상추 하나만 봐도 같은 가격이면 받아오는 양이 두 배는 되는 것 같다. 재래시장에서 장을 보면 넉넉히 얹어 주시는 덤 덕분에 돌아오는 길 손은 무겁고 마음은 가볍다.


예전에 미국에서 살 때는 일요일마다 동네 공원에서 Farmer's Market (파머스 마켓)이 열렸다. 그런데 파머스 마켓에선 직거래라는 말이 무색하게 농산물의 가격이 오히려 비쌌었다. 지역 농부들을 돕는 차원에서 그리고 아이들 교육 차원에서 가끔 파머스 마켓을 이용하곤 했지만 사실 가격이 너무 비싸서 대부분의 장은 편리하고 값싼 대형마트를 이용하곤 했다. 미국의 파머스 마켓은 도시의 사람들이 옛스럽고 자연적인 멋을 찾기 위해 웃돈을 주고 찾는, 예를 들면 커피숍에서 비싸게 파는 달고나 같은 느낌이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의 재래시장은 엄청난 매력이 있다. 가격이 훨씬 쌀 뿐만이 아니라 매일매일 최고로 신선한 지역 농산품을 만날 수 있는 데다가 쉬는 날마저 없어서 대형마트보다 훨씬 편리하다. 엄청 맛있고 값도 싼 달고나를 커피숍이 아닌 동네 문방구에서 만난 느낌이다.


사실 재래시장의 진짜 매력은 물건보다는 사람에 있다. 재래시장에선 잊고 살았던 고국 생활의 소박하고 재미난 매력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태어나 살던 곳을 떠나서 살아 본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도 발견한다. 재래시장에서 넉넉한 덤을 얹어 주실 때는 받는 손이 황송하고 내 마음에까지 그 넉넉함이 전염된다. 이렇게 많이 안 주셔도 되는데, 오히려 팁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떠나 보지 않고서는 눈치 채지 못했을 사랑스런 일들이 많다. 가끔 웃음이 터지는 사건도 생긴다.


봄을 기다리던 늦겨울의 어느 쌀쌀한 오후였다. 시장 입구 건널목을 건너는 데 맞은편 인도 위에 빨간 바가지 두 개를 갖다 놓고 쪼그려 앉아 한라봉을 파시는 할머니가 계셨다. 아직 쌀쌀한 날씨에 나와 계신 행상 할머니들을 보면 가끔 필요하지 않은 물건도 사게 된다. 부러 싱싱하지 않은 물건을 사게 된다. 내가 사드리면 오늘 집에 조금은 일찍 가시지 않을까 생각이다. 그날도 집에 귤이 한 상자나 있는데도 그 할머니의 작고 꼭지가 말라 비틀어가는 한라봉을 꼭 사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을 여쭤보니 한 예닐곱 개쯤 들어있는 바가지 하나에 만원이라 하신다. 안 그래도 정말 싸다고 생각하는 순간 옆에 서서 신호등을 기다리며 구경하시던 할아버지께서 한라봉 겉껍질의 까슬 까슬 긁힌 상처가 신경이 쓰이셨는지 불쑥 끼어드셨다.


"못생겨 보여도 원래 저렇게 생긴 게 더 맛있는 거야. 한라봉이 저만큼에 만원이면 엄청 싸네. 선물할 거 아니면 이런 게 더 맛도 있고 좋아."


시장에선 이렇게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듯 불쑥 끼어드는 오지랖이 드물지 않다. 이런 무심한 듯 가벼우면서도 정겨운 마주침이 재래시장의 진짜 묘미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허물없이 말을 건네는 할아버지가 정겹게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응원에 힘입어 필요하진 않지만 한라봉 만원 어치를 사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봉지를 받고 돌아서려는 순간 할머니께서 한라봉을 두 개나 더 집어서 손에 쥐어 주시는 게 아닌가? 아이고... 이건 할머니 생각해서 사 드리려고 하는 건데... 사실은 집에 귤이 한 박스나 있는데... 너무 싸게 파시면 남는 게 없으실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며 "아니에요. 괜찮아요."라고 얼른 말했지만 마음이 넉넉하신 할머니는 굳이 내 손에 한라봉 두 개를 더 꼭 쥐어 주셨다.


순간 그 넉넉한 인심에 전염이라도 된 듯 나는 그 받은 한라봉 두 개를 옆에 계신 할아버지께 건넸다. "할아버지 이것 좀 드세요. 저는 사실 많이 필요 없어요. 조금만 있으면 돼요."


아니 그런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당연히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숙하게 말 건네시던 할아버지께서 이번엔 얼른 뒤로 물러서시는 게 아닌가. "아냐 아냐. 난 안 먹어" 하시면서 낯설어 하시는 모양이 갑자기 날 영판 잘 모르는 사람 대하듯 하시는 거다.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친조카 대하듯 하셨던 양반이 말이다.


그래서 받은 한라봉 두 개를 다시 할머니께 내밀었다. "할머니 감사해요. 그런데 저는 많이는 필요 없어요. 이거는 다른 사람들한테 돈 받고 파세요."라고 말씀드리고 막 건네드리려는 순간, 옆에서 그걸 보고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다급하게 외치셨다.


"아니 그걸 왜 다시 줘. 다시 줄 거면 나 줘!"


할아버지께 한라봉을 건네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웃음이 터졌다. 마음은 따뜻한 느낌으로 가득 차서 행복한 가운데 생각할수록 무심한 듯 친절하고 또 가까운 듯 낯설게 행동하시던 할아버지가 재미나서 참을 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사랑스런 오지라퍼 할아버지는 상황에 따라 못생긴 한라봉을 파는 할머니 편도 되셨다가 물건을 더 싸게 많이 가져 갈 기회를 놓쳐 버릴 위기에 처한 내 편도 되셨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서는 아무거나 넙쭉 받아가지 않는 체면도 차리셨다가 공짜로 물건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그냥 어리숙하게 보내 버리지는 않는 실속도 차리셨다.


상황에 따라 이쪽 편도 되었다 저쪽 편도 되었다 하시는 오지라퍼 할아버지에게는 "너"와 "나" 사이의 경계가 없는 듯하다. 남의 일이 내일 같아 자꾸 간섭하게 되시는 것이리라. 잘 모르는 남이라도 손해 보는 건 싫으신 게다. 남도 이익을 보는 게 좋으신 게다. 혹시라도 내가 남에게 피해가 될까 선뜻 남의 선의를 받아들이진 않지만 그게 아니라면 내 실속을 차리는 게 나에게도 남에게도 이익이라 여기시는 게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국의 재래시장에는 이런 소소하게 재미난 맛이 있다. 다채로운 사람 사는 맛이 있다. 동네 문방구에서 팔던 진짜 달고나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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