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향기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큰 기쁨이다. 우연히 들른 시장 골목이나 관공서에서 또는 커피숍이나 식당에서 그런 향기 나는 인연을 만나면 반가운 느낌이 환하게 가슴을 채운다. 그 느낌이 좋아 다시 그곳을 찾게 된다. 가게라면 그곳의 단골이 된다.
파는 사람의 향기가 귀한 가게에서는 파는 물건이 조금 부족해도 괜찮다. 파는 사람이 나누어 주는 행복이 사는 물건보다 더 큰 값어치가 있다. 향기로운 말과 행동과 손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감동을 준다. 사실 향기로운 사람이 하는 가게에서는 파는 물건도 좋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넓고 여유로운 마음에서 나온 넉넉함과 부드러움이 파는 물건에도 오롯이 배어 있기 마련이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커피숍에는 매우 까다롭다. 일단 단골이 되면 다른 곳은 잘 안 가게 된다. 취향에 맞는 커피숍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산미가 적고 부드럽게 떨어지는 향기가 깊고 풍부한 커피가 좋다. 요즘 유행하는 핸드드립은 내 취향이 아니다. 에스프레소에 아주 소량의 우유와 거품을 넣은 에스프레소 마끼아또를 좋아한다. 진하고 부드럽고 향기로운 커피를 마실 때 에스프레소 커피만큼이나 진하게 농축된 행복감을 느낀다.
워싱턴 디씨의 숨겨진 보물 같은 골목인 Blagden Alley라는 곳에는 La Colombe이라는 커피숍이 있다. 작년 봄까지만 해도 주말 아침에 이 커피숍에 가면 언제든 우리 가족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항상 활기차고 상냥한 바리스타들이 반겨주는 이 작은 체인 커피숍에선 행복을 판다. La Colombe의 블랜딩 커피 Nizza로 만든 에스프레소 마끼아또에 정제되지 않은 생 설탕 한 스푼을 넣어 마시면 인생의 향긋함과 달콤함이 여기 이 한잔 안에 다 담겨 있구나 싶다. 사실 커피 마시는 즐거움은 설탕을 넣어 젓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작은 숟가락으로 찻잔 안을 톡톡 치면서 젓는 느낌이 경쾌하고 행복해서 설탕이 다 녹고도 한참이 지날 때까지 계속 젓는 습관이 생겼다.
제주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커피숍이 있었다. 잘 모르긴 해도 워싱턴 디씨에 비하면 인구 대비 두세 배는 더 많은 커피숍이 존재하는 것 같다. 수지 타산을 어떻게 맞추나 걱정되는 한산한 커피숍도 많은데 개중에는 내 취향은 아니더라도 커피맛과 분위기가 세계 최고 수준인 곳도 있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제주에 왔을 때 처음 몇 달간 괜찮다고 소문난 거의 모든 커피숍을 다 돌아다녔다. 몇 군데의 단골 비슷한 커피숍을 거쳐 지금의 용담 해안가에 있는 한 체인 커피숍에 정착했는데 사실 이 커피숍은 우연히 찾았다. 미국에 있을 때부터 큰 체인 커피숍에는 거부감이 있었기에 주로 로컬 커피숍을 찼았던 차다.
경치를 보려고 별 기대 없이 들어간 이 커피숍에서 반갑게 마주친 것은 말과 행동과 손길이 향기로운 사람이었다. 환하게 웃으면서 "어서 오세요." 하는 순간 정말로 목소리와 표정에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마음이 행복해져서 커피 주문을 마치기도 전에 벌써 이곳을 다시 찾게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커피맛이 딱 내 취향이었다. 부드럽고 진하고 고소하기까지 한 커피 향에 커피를 건네는 사람의 손길에서 나온 향이 더해졌다. 같은 커피숍에서 똑같은 원두로 같은 기계를 가지고 만드는 커피도 만드는 바리스타의 손길에 따라 다른 맛이 난다. 마음이 향기로운 사람이 만드는 커피에는 그 사람의 향기가 더해지는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이 커피숍에서 오랫동안 일한 직원들은 모두 마음에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직원들은 수시로 매장 구석구석을 다니며 늘 깔끔하게 청소하고 다녔다. 미국의 레스토랑에서처럼 친절하다고 해서 손님이 팁을 더 주는 것도 아니지만 종종 묻지 않아도 필요한 것을 가져다주고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치워 주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상냥한 행동과 손길에선 향기가 난다. 그런 행동을 보는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이쯤 되면 사장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직원 한 사람에게서 향기가 난다면 그것은 한 개인의 일일 테다. 하지만 대부분의 직원에게서 향기로움이 느껴진다면 그건 그 사람들을 고용한 사람의 역할이 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사장은 말이 없고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 쑥스러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 커피숍을 일 년 동안 매일 출근하다시피 다녔지만 뒤에서 말없이 일만 하는 사장과 잠시라도 이야기를 나눠 본 일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하지만 그 쑥스러움 뒤에 조용히 친절한 마음이 느껴졌다. 잘은 모르긴 해도 아마 사장은 직원들에게 친절할 것 같다. 직원들이 향기로운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은 때맞춰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주는 보살핌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일 거라 생각 들었다. 모르긴 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감동을 주는 행동이 있었기 때문일 거라 생각되었다.
사람이 향기로운 공간에서는 그 향기가 방문하는 사람들에게도 번지나 보다. 남편이 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입원을 하느라 커피숍을 한동안 못 갔던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구석의 창가 자리에 청년 두 명이 앉아 있었다. 근래 몇 달간 자주 보던 청년들이었다. 이른 아침에는 이 청년들과 우리 부부만 2층을 지키는 날이 많았다. 평소 반대편 한라산을 바라보는 창가에 앉던 이들인데 우리가 나타나지 않은 사이 바다가 내다 보이는 창가 자리로 옮긴 듯했다. 남편이 많이 실망했다. 실망한 남편을 보고 나도 마음이 안 좋았다.
한 이틀쯤 지났을까. 커피숍 2층에 들어선 내 마음이 환하게 따듯해졌다. 청년들은 여전히 커피숍에 있었지만 바다 쪽 창가 자리가 비어있었다. 청년들이 다시 예전 자리로 돌아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커피숍에서 무수한 아침을 같이 보냈지만 한 번도 말을 섞지 않았던 청년들이다. 우리가 실망한 것을 어떻게 안 걸까? 멀리서 우리끼리 속삭이는 말을 알아 들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