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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선생 Oct 12. 2020

한국을 떠나 보고 서야 알게 된 것들

한국의 커피숍에선 랩탑으로 자리를 잡는다


미국에서 산 날이 햇수로 17년이다. 그러고 보니 살아온 인생의 1/3을 훨씬 넘는 시간을 한국을 떠나 있었던 셈이다.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서 살아보면 좋은 점이 있다. 떠나기 전에는 몰랐을 것들이 보인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고 나서야 물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살 땐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 중에 지금은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커피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나는 화장실을 갈 때마다 우리가 한국에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행복하다. 사용하던 랩탑이나 가방을 그대로 테이블 위에 두고 화장실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간 편리하고 자유로운 게 아니다. 처음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미국에서처럼 사용하던 랩탑과 가방을 주섬 주섬 챙겨 가지고 화장실에 갔다. 어느 날 그런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사람의 눈길을 느끼고 나서부터는 그런 행동을 멈췄다. 한국의 커피숍에서는 랩탑이 자리를 잡기 위한 용도로 사용된다.


워싱턴 디씨의 커피숍에서는 소지품을 잘 챙겨야 한다. 잠시 한눈을 팔거나 화장실 다녀오는 사이에 랩탑이 없어질 수 있다. 심지어 한눈 안 팔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데도 코를 베가는 일도 생긴다. 화창한 날 근사한 레스토랑의 야외 좌석에서 남편과 마주 보고 기분 좋게 식사를 하다가 옆좌석 의자 위에 올려 둔 가방을 소매치기당한 적도 있다. 소매치기가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날쌘 매처럼 달려와서 가방을 낚아 채 갔다. 어? 어... 하는 사이에 바로 눈 앞에서 당했다. 남편이 얼른 일어나 쫓아가는데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라도 소매치기가 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남편을 큰소리로 부르며 제발 가지 말라고 사정했다. 궁지에 몰린 도둑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도둑맞은 가방은 새로 사면 되지만 남편은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물론 이런 일이 매번 일어나는 건 아니니다. 아주 가끔이다. 17년 사는 동안 겪은 일이 아마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것이다. 하지만 어쩌다 한번 이런 일을 겪게 되면 그때부턴 조심하게 된다. 가방 올려놓을 곳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나도 모르게 내가 있는 곳이 안전한 곳인지를 확인하게 된다. 사실 미국에선 습관처럼 안전을 체크하면서 살았다.


작년 여름, 집을 정리하고 오느라 미국에서 조금 늦게 출발한 남편이 이미 제주에 와 있는 우리와 합류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평소보다 훨씬 늦게 일어난 남편이 일어나자마자 말했다.


"I think I fell in love with this city."

나 이 도시와 사랑에 빠진 것 같애.


남편은 시차 적응이 안돼서 전날 밤늦게까지 잠을 못 잤다고 했다. 밤새 뒤척이다가 도무지 안 되겠어서 밤마실을 나갔단다. 한국이 안전한 줄은 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는 큰길 쪽으로 산책을 시작했다가 한 공원을 발견했단다. 그런데 그 공원에는 밤 12시에 혼자 운동 나온 아줌마 아저씨들이 그렇게 많았다는 거다. 아마 더위를 피해서 밤에 산책을 하러 나온 사람들이었을 테다.


남편은 덩치가 산만한 자신은 밤길에 다른 사람을 보면 긴장이 되는데 밤마실을 나온 아줌마들의 얼굴에는 전혀 두려움이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무서워하지 않을까 그게 조심스러웠다했다. 그렇게 새벽 두 시까지 온 제주시를 돌아다녔단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밤에 마실을 나간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밤에 본 제주는 정말 사랑스러운 도시라고도 했다.


남편은 그렇게 제주에 온 지 삼일 만에 제주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그 사랑은 날이 갈수록 더 깊어졌다.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제주의 자연에, 거의 모든 일을 걸어서 해결할 수 있는 편리한 생활권에, 무심한 듯 다정한 한국 사람들의 인간미까지 더해져서 지금은 거의 제주 예찬론자가 되었다. 사실 남편뿐 아니라 나와 아이들까지 온 식구가 제주와 사랑에 빠졌다.


심리학자 메슬로우는 먹고 자고 하는 등의 생리적인 욕구 다음으로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가 안전의 욕구라고 했다. 메슬로우는 안전에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관계의 욕구, 성취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같은 보다 고차원적인 욕구들은 추구하지 않게 된다고 주장했다.


어찌 보면 오늘날 우리가 꿈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이 많은 문제와 고민들이 먹고사는 문제와 안전에 대한 우려가 해결이 된 편안한 사회에서 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모르긴 해도 남편이 그날 밤 제주의 아름다운 밤 풍경과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분위기가 한 몫을 했을 것 같다.


없어 보고 나니 알게  소중한 것들이 정말 많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나와 봐야 물이 얼마나 중한지   있듯이 한국 밖에서 살아 보고 나니  안에서 누렸던 소중한 것들이 보인다. 간사한  사람 마음이라는데... 물속에 다시 들어왔다고 해서  금세 물의 소중함을 잊어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물고기는 되지 말아야겠다 생각 든다.


오늘 밤에는 밤마실을 잠시 나갔다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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