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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선생 Nov 30. 2020

미스테리가 스토리가 된 날

나타났다 사라졌다 미스테리 관탈섬

관탈섬

단골 커피숍의 지정석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면 수평선 왼쪽 끄트머리에 흐릿하게 보이는 작은 섬이 하나 있다. 같은 곳을 내다본 지 1년이나 지나서야 내 눈에 들어온 그 섬을 한동안 관찰한 끝에 섬이 날씨에 따라 어떤 날은 선명하게 보이고 어떤 날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재미있는 것은 아주 화창하게 맑은 날에는 섬이 오히려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도 잘 보이지 않는다. 오늘같이 흐릿한 날씨에 맑은 햇빛이 홑겹 비단 같이 얄팍한 구름을 통과하며 은은하게 스며들 때 가장 선명하게 보인다. 


지나치게 좋은 날씨에도 지나치게 나쁜 날씨에도 잘 보이지 않다가 이도 저도 아닌 은은한 날씨에 제 존재를 뽐내듯 선명하게 나타나는 그 섬의 매력에 푹 빠졌다. 동물을 아주 사랑하지만 상황 때문에 애완 동물을 키우지 못하는 나에게 때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그 작고 귀여운 섬이 마치 커피숍에서 키우는 애완 섬처럼 느껴졌었다고 하면 사람들이 날보고 드디어 미쳤다고 할까?


기쁨을 주는 그 신기한 섬의 미스터리가 오늘 택시 안에서 풀렸다. 오늘 아침 따라 유독 선명하게 나타난 그 섬을 보고 택시 기사 아저씨께서 그 섬의 이름이 "관탈섬"이라고 알려 주셨다. 옛날 제주에 유배를 오던 관리들이 관탈섬에서 관복을 벗고 제주에 들어왔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잠시 그 옛날 긴 여행 끝에 관탈섬에 도달하여 관복을 벗고 있는 관리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상상했다. 왠지 억울한 마음이 들진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홀가분하지 않았을까 생각됐다. 그 옛날의 느릿느릿한 교통수단을 타고 한양에서 처음 여행을 시작했을 때에는 아마 억울했을 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마음속에 욕심이 가득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느리고 긴 여행 끝에 섬에 도달했을 즈음에는 아마 억울함도 욕심도 많이 내려놓아지지 않았을까? 관탈섬에서 옷을 벗고 직책도 벗고 이름도 버리면서는 관복에 끈질기게 붙어있던 마지막 남은 지푸라기같았던 미련마저도 훌훌 떼어 버릴 수 있지 않았을까? 유배 옷으로 갈아 입으면서는 오히려 다 털어 버린 마음이 홀가분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스토리를 알고 나서 섬이 더 좋아졌다. 마음에 쏙 드는 이름과 스토리였다. 마치 애완 섬이 요즘 내 생활과 마음을 다 알고 조용히 곁에 다가와 준 느낌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관탈섬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제주에 와서 사는 동안 나 역시 몸과 마음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것들이 많이 벗겨진 듯한 느낌이다. 제주에서 가족 외의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고 일 년을 보내면서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직책, 일, 소유물, 관계, 습관... 이런 나와 나의 생활을 구성하던 많은 것들이 서서히 옅어지는 느낌이다. 


제주의 거센 파도를 보고 있노라면 파도가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밀려와 마음속 끈적끈적거리는 습관 같은 생각들을 깨끗이 씻어내려 준다. 짭조름하고 세찬 제주의 바람을 맞으면 몸속 구석구석 지저분한 것들이 깨끗이 정화되어 날아가 버린다. 가진 것도, 책임도, 고민도 없는 제주에서의 삶은 아주 가볍다. 행복하다. 


이 글을 쓰는 사이 어느새 다시 흐릿해진 섬을 바라보는 마음이 아주 평안해졌다. 마치 작은 참새 한마리가 소리도 기척도 없이 전깃줄에 살짝 내려 앉은 것처럼 은은한 위로 같은 평화가 살포시 마음속에 찾아왔다. 잠시 글을 멈추고 한없이 평화로운 느낌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을 만끽했다. 


먼 옛날 관탈섬에서 옷을 벗고 제주에 들어온 나의 선조 역시 이런 느낌이었을까. 그도 역시 이처럼 한없는 위로 같은 평화를 잠시 선물 받았을까. 아마 그랬을 테다. 분명 그랬지 싶다. 



은은하게 흐린 날의 관탈섬 (2020년 11월 30일)





다음날 화창하게 맑은 날의 관탈섬 (2020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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