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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선생 Dec 06. 2020

이상한 제주의 마법 같은 시간

삶에도 쉼표가 필요한지도

제주에서는 시간이 마법처럼 흘러간다. 잠시 멈추고 가만히 시간을 느끼는 이 순간은 아주 천천히 흘러간다. 너무 천천히 흘러가서 시간이 멈추었나, 지금이 영원같이 느껴지는 때도 있다. 하지만 한 시간은 5분보다 빨리 지나간다. 영원같이 느껴지는 5분은 그리 천천히 지나갔으면서 한 시간은 어느새 벌써 지나 있다. 그뿐인가. 하루는 한 시간보다 훨씬 빨리 지나간다. 한 달은 하룻밤만 자고 나면 지나가 버리는 것 같다. 올 가을은 잠시 한숨 돌리고 나니 벌써 지나갔고 이제 겨울이 코앞이다. 지난 1년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이야기 속에서 모자 장수가 가진 시계에는 몇 시 몇 분인지는 안 나오고 날짜만 나온다더니... 제주에 사는 내게는 그 시계가 딱 어울리지 싶다. 이상한 섬 제주에 사는 이상한 이방인인 나의 시간 감각에 어울릴만한 시계는 소설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이상한 시계뿐이리라.


미국에서 살 때의 우리에게는 같은 소설의 오프닝에 나오는 늦었다고 동동대는 하얀 토끼가 가지고 있던 주머니 시계가 아마 더 어울렸을런지도 모르겠다. 하루 종일 동동대는 나의 모습을 엘리스가 봤다면 아마 토끼를 따라갔던 때처럼 나를 따라갈 생각은 안 했지 싶다. 바쁜 직장인 엄마의 동동거릴 수밖에 없는, 겉으로 보기에 매일 똑같은 일상은 신기한 모험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 보였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매일 똑같은 일상이라고 마법 같은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엘리스가 자동차 타는 걸 좋아했다면, 그리고 조용한 것을 싫어하지 않는 아이였다면 새벽 출근길에 운전하면서 마법같이 평온한 순간을 맞이하곤 했던 나와 함께 아주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복잡한 워싱턴 디씨의 교통체증을 피해 나무가 우거진 Rock Creek Parkway의 숲길을 따라 질러가는 아름다운 출근길에선 나와 함께 눈물을 흘릴 때도 많았을 것이다. 봄에는 노랗고 빨갛고 하얗고 보랗게 흐드러진 들꽃에, 여름에는 짙고 선명한 파릇파릇 푸른 내음에, 가을에는 눈앞에서 눈 내리듯 흩날리는 빨강 주황 노랑 낙엽에, 그리고 겨울에는 앙상한 회색 갈색 나뭇가지 사이로 빼꼼히 모습을 드러내는 우아한 사슴의 자태에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만약 엘리스가 눈물이 별로 없는 아이였다면 하루 건너 하루마다 우는 내가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되어 주었을 것이다. 툭하면 행복해서 감사해서 감동해서 아름다워서 운다는 이 아줌마야말로 이상한 나라의 아줌마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마법처럼 흘러간 것은 제주에서만이 아니었다. 어느 출근길 아침에는 시간이 느려지면서 유난히 선명해진 푸르른 숲이 마음속으로 훅 하고 들어와 커다래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날도 있었다. 남편 일을 돕느라 퇴근 후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저녁에는 하는 일에 어찌나 몰두했던지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카페에 앉자마자 종업원이 카페 종료 시간을 알려주는 것 같아 깜짝 놀랐던 적도 있었다.


제주에서 시간이 마법같이 흘러가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닌 듯하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마법 같은 순간들을 마주치게 되는 때가 종종 있는데 하물며 선물 같이 주어진 제주 생활에선 마법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도 우연히 마음에 쉼표가 찍어지면 순간이 영원같이 느껴진 때가 있는데, 하물며 제주에서 삶의 쉼표를 찍은 우리 가족에게는 마법 같은 순간이 일상이 되는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제주에 사는 동안 삶에도 쉼표가 필요했나보다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동안 쉬면서 간소한 삶이 주는 가벼운 즐거움을 발견했다. 통제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삶이 이끄는 대로 맡기며 사는 인생의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코로나로 모두가 힘들지만 그 속에서 더 아름답게 빛나는 인간애가 주는 깊은 감동도 느꼈다.


삶에도 쉼표가 필요한가 보다. 살면서 가끔은 마법 같은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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