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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선생 Jan 25. 2021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이 우리에게 물었다. 뭣이 중한디.


에세이를 쓰기 시작하면서 남편의 암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보는 게 어떻겠냐는 질문을 받았었다. 우리의 스토리가 비슷한 일을 겪는 분들과 그 가족 분들께 위안이 될 수도 있지 않겠냐는 뜻에서 하시는 말씀들이었다. 나도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조심스러웠다.


남편의 암은 수술 경과가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좋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크게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공감이 가지 않으실  같았다. 암을 겪으면서 힘든 일보다는 감사한 일과 행복한 일이  많다고 하면 믿지 않는 분도 계셨다. 아마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한 말이라 생각하시는 듯했다.  뿐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1% 생존율과 맞서 싸우고 있을런지도 모르는 환우들께 왠지 죄송한 마음까지도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마음 깊은 곳에 꽁꽁 숨어 있던 두려움도 있었던 것 같다. 아직도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행복하고 편안한 마음이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앞으로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도, 나의 마음이 언제 변할지도 모르는 데 지금의 솔직한 내 마음을 글로 드러내었다가 마음이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 혹시라도 징크스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까지도 있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남편의 암에 대한 글을 쓰게 된다면 그것은 위로를 위한 글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우리 가족의 이야기일 뿐일 것이다. 전투적이지도 극적이지도 않은 암이라는 삶의 한 사건을 맞이한 한 가족의 일상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일상을 살면서 가졌던 생각과 느낌은 오롯이 그 당시의 것이다. 앞으로 나와 우리 남편이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어떤 마음으로 살 지는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이제껏 일어난 일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일 뿐이다.


그런 내가 지금까지 한 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우리가 암이든 앞으로 닥칠 수도 있는 어떤 다른 어려움이든, 그 어려움을 가지고도 행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는 것이다.


사실 남편이 진단을 받기 전부터 수술을 거쳐 지금에 오기까지 우리의 삶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힘을 빼고 산다. 삶의 거대한 강을 따라 흘러가듯 그렇게 물살에 온 몸을 맡기고 살아간다. 일어나는 일은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즐거운 순간을 즐기며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간다. 물론 그 과정에서 고민과 갈등과 두려움의 순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마저 우리에게는 소중했다. 그것이 암이 되었든 사업을 접는 일이 되었든 삶이 주는 도전과 고난이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다. 불행 중 다행인 일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를 위한다는 것이 모든 일이 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거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잘 풀릴 거라 믿는 것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삶이 내가 바라는 데로만 갈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내 솔직한 심정이 그런데 내가 그런 나의 걱정을 애써 외면한다고 해서 걱정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지는 않을 것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일이라고 믿는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상상한 최악의 결과가 오더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나의 성장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다. 만약 우리에게 고난이 온다면 나와 내 남편과 내 아이들과 우리와 관계 지은 모든 이들이 그 고난을 통해 성장할 것이라고 믿는다. 겉으로 보기엔 고난인 일들이 나중에 보면 축복이 될 거라고 믿는다.


뿐만 아니다. 내가 지금 원하는 일이 결국 나를 위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토록 성공하기 원했던 남편의 사업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아 사업을 잠시 접어야 했었을 때, 우리가 절대 원치 않았던 일이 일어났지만 이 또한 우리를 위한 것이리라 믿었었다. 지금에 와서 돌아봤을 때 정말로 사업을 접지 않았더라면 우리 가족이 이렇게 제주에 와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뿐인가. 남편의 암을 더 늦기 전에 발견하지도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삶이 무엇을 주든 그저 감사하게 받아들일 일이다. 만약 나쁜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모르는 더 나쁜 일을 막아 준 일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최선이라 믿는 편이 좋을 것이다.


만약 내가 다 내 뜻대로 잘 풀리기만 기대하고 그렇게 되었을 때에만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나는 아마 용기 있게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고난에도 불구하고 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고 사랑할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올라올 때에도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현실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며 오늘에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었다.


암은 우리에게 물었다. "뭣이 중한디."


암은 삶에서 무엇이 중하고 중하지 않은지를 더욱더 분명하게 알게 해 주었다. 우리는 중한 것만 추구하고 중하지 않은 것에는 더 이상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고 싶지 않다. 물질적인 성공을 위해 일상의 행복을 희생하고 싶지도 않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오히려 현재 일상들의 소중함을 강한 스포트라이트로 선명하게 비춰준다. 매 순간이 선물이자 축복임을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편안한 일상을 지낼 때는 알지 못했던 일상의 소중함이 고난 속에서 더 찬란하게 빛난다. 그러고 보면 오히려 암으로 인해 얻은 것들도 많았다. 코로나로 얼룩진 2020년 암을 얻은 우리 가족은 고난과 동시에 축복 또한 함께 받았다.


나라고 의심이 갈 때가 없었겠는가. 남편이라고 두려울 때가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심과 두려움을 넘어서는 용기를 만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사랑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경험이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남편의 감탄스러운 담대함을 보며, 우리의 하루가 더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경험하며 나는 고난이 아니라 고난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확실한 미래가 아니라, 바꿀 수 없는 과거가 아니라, 언제나 확실하고 유일무이한 지금이, 이 순간만이 희망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사랑과 용기, 이거 두 개면 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앞으로 남편의 암을 진단받은 후 있었던 일을 기억을 더듬어 조금씩 써 볼까 한다. 부디 나의 부족한 글이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일은 없기를. 지금 내 마음속 가득한 이 사랑이 여과 없이 전해지기를. 결국은 나를 위해 쓴 이 글이 단 한 사람의 마음에라도 닿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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