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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선생 Jan 30. 2021

결국은 대천명

위기의 순간에 의지처가 되었던 말, 진인사대천명


"... 조직 검사에서 채취한 11군데 조직 중 7 군데에서 악성 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았다. 어제 병원에서 예약 확인차 전화가 왔을 때부터 뭔가 찝찝했다. 이제껏 병원에서 예약 확인 문자가 왔었던 것과 달리 어제는 전화가 왔었다. 왜 문자가 아닌 전화로 예약 확인을 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올라왔지만 남편에게 말하진 않았다. 별일 아닌 일에 큰 의미를 두지 말자. 내일 가서 확인하면 될 일을 미리 걱정 말자 애써 외면하고 있던 차였다. 결국 내가 큰 의미를 두었든 두지 않았든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 미리 걱정한다고 안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고 안 일어나는 것도 아닌 일이, 그저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

 

검사 결과를 설명하는 의사의 목소리가 조금은 차갑고 냉정하게 들린 것은 나의 기분 탓만은 아니었을 테다.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은 얼마나 많은 환자들에게 안 좋은 소식을 전했어야 했겠는가. 섣부른 절망도 헛된 희망도 주지 않기 위해 어쩌면 이 의사도 최대한 감정을 배재한 목소리를 내는 길을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질 게 뻔한 환자와 가족들의 드라마에 휩쓸려 함께 탄 배가 좌초되는 일은 없도록 키의 중심을 단단히 잡고 이성적인 사고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공부를 그토록 많이 한 의사들에게도 사람들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을 마주치게 되는 인간 극장의 한 장면 같은 이 순간이 가장 어려운 과제일지도 모르겠다.

 

악성 종양이 발견되었다고 말하면서 의사는 우리와 눈을 마주치는 대신 컴퓨터 모니터를 돌려 사진을 보여주었다. 조직 검사를 하기 전에 이미 한번 보았던 MRI사진이었다. 11군데의 조직을 떼서 검사한 결과 7군데에서 암이 발견되었다고 설명하는 의사의 목소리가 보고 있는 모니터 화면만큼이나 기계적으로 들렸다. 한두 군데도 아니고 7군데라니... 이런 때는 나의 활발한 상상력이 반갑지 않다. 나도 모르게 벌써 한참을 굴러가기 시작한 머리에 애써 브레이크를 걸었다. 정보는 딱 아는 만큼만 받아들이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더 부풀리지 말자...

 

굴러가는 생각에 브레이크를 거는  애를 너무 많이  탓일까. 갑자기 모니터가 흐릿해지면서  보이지 않더니 한번 깜빡이지도 않은 눈에서 또르르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편이 불쌍했다. 불쌍하고  불쌍했다. 불쌍한 남편 생각에  앞이 자꾸 흐려졌다. 나의 눈은 흐릿한 모니터를 보고 있고 나의 귀는 의사 선생님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있었지만 나의 마음은 온통  옆에서 대충 눈치로 상황을 알아듣고 있는 불쌍한 남편을 향해 있었다. 함께 모니터를 바라보며 남편에게 통역을 하는데 이제는 모니터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아무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를. 일부러 닦지 않은 눈물이  위로  흘러내리고 자국마저  마를 때까지 아무도 나를 보지 않기를. 누군가와 눈을 마주친다면 갑자기 오열이 터져 나올지도 모르는  모습을 들켜서 오열하게 되는 일은 없기를.

 

암이 어느 정도로 진행이 되어 있는지,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었는지 등의 여부는 아직 알 수가 없어 MRI와 CT 등 추가 검사를 더 해 봐야 한다고 했다. 그것도 검사 예약이 밀려 아마 2주 정도 지나야지 검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하며 의사가 3주 후에 면담 일정을 잡아 주었다. 3주라는 말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세 시간도 아니고 3일도 아니고 3주라니. 다급한 마음에 조금 더 일찍 검사와 면담 일정을 잡을 수는 없냐고 재차 물었지만 의사는 전립선 암은 빨리 퍼지는 암이 아니라고 하며 급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단다.

 

빨리 퍼지는 암이 아니라고? 잠깐, 이 의사는 조직 검사를 하던 날에도 검사 결과 암이 나올 확률은 5% 밖에 안된다며 우리더러 안심하라 하지 않았던가. 암이 빨리 진행되지 않을 거라는 의사의 말이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물론 내 남편이 그 특별하다는 5%에 들어간 것은 이 의사의 탓이 아니다. 의사가 틀렸던 것도 아니다. 5% 확률이라는 것은 누군가는 확실히 그 5%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100명 중 다섯 명은 100% 암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내 남편이 그 5%에 들어간 데에는 이 의사의 잘못이 하나도 없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의사가 미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미덥지 않았던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분과의 인연은 여기 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사가 끝나면 치료는 다른 의사를 찾아야겠다 생각했고 결국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훗날 돌이켜 봤을 때 남편의 암투병 기간 중 아마 가장 힘들었던 때가 바로 이 3주간이었지 싶다. 암이라는 걸 알고도 어느 정도 진행이 되었는지를 알 수 없으니 앞으로의 대책을 확실하게 세울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단지 기다리는 것 밖에는 없는 때가 바로 이때였다. 온갖 책과 인터넷을 통해 방대한 연구를 하다 보니 쓸데없이 상상력만 팽창하는 기간이 바로 이때였다. 그러니 그 의사도 내가 그를 잠시 미워했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당신 동생이 암에 걸렸더라도 3주 후에 보자고, 급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겠느냐고 나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만 했던 것쯤은 용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땐 미웠지만 지금은 그저 감사하기만 한 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봐줄 수 있지 않을까.

 

좀 더 정확히 따져보면 내 마음이 가장 힘들었던 것은 진단을 받고 일주일이 조금 안 지났을 때였던 것 같다. 인터넷에서 조직 검사가 오히려 암세포를 더 퍼뜨릴 수도 있다는 내용을 읽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속설이 근거가 없다는 내용의 실험 연구 결과였다. 근거가 없다고는 하지만 그런 속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생각이 많아졌다. 요즘엔 선무당이 아니라 인터넷이 사람 잡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단단히 잡아주는 말 중에 "진인사대천명"이란 말이 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후에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그 말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 때마다 나에게 의지처가 되어주곤 했다. 그런데 문득 이번에는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정말로 다 했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정말로 추가 검사와 치료를 지금보다 더 빨리 진행할 수 있는 길은 없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는 제주도에 친지들이 많다. 만약 친지들께 우리의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더라면 다른 병원을 알아 봐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가능한 한 빨리 검사를 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주셨을 것 같았다. 3주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이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원치 않는다고 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있던 차였다.

 

그런 내가 문득 뭔가 내가 할 일을 다 하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올라왔다. 하늘의 뜻을 기다리기 전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고 믿고 무조건 편안하게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후에 어떤 결과가 나오든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나의 경우에는 전자가 편안하지 않다. 살면서 모든 일이 항상 잘 될 수는 없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을 때는 편안할 수 있다. 그렇게 했을 때는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것이 좋든 나쁘든 다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설사 그 결과가 나쁜 것이더라도 그것은 나의 노력과 통제 밖의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 한 후에 나온 결과는 아무리 나쁜 것이더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하늘이 나를 위해 주는 것이리라 믿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의 고집을 꺾는 것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일찌감치 배웠다. 심지어 그건 어쩌면 하늘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일 런지도 모르겠다. 결국 남편을 설득하여 친지께 부탁하는 것은 이내 포기했다. 대신 병원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검사일을 당길 수 있는 길이 없는지. 받아야 할 검사가 여러 개라서 일정을 빨리 잡기가 힘든 거라면 여러 번 나눠서 가면 조금이라도 일찍 받을 수 있는지도 알아보았다. 그런데 결국 이미 잡혀있는 일정 그대로 진행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이 났다.

 

그렇다면 검사 결과를 더 빨리 알 수는 없어도 치료 계획이라도 미리 준비해 둘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때는 나의 연구자 기질이 유용하다. 전립선 암과 암 치료 전반에 대한 한국어 자료와 영어 자료를 두루 섭렵했다.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식이요법을 남편을 설득하여 바로 시작했고 여러 가지 치료 방법의 장단점을 정리하여 남편과 상의했다. 전립선암 명의에 대한 인터넷 기사를 다 뒤져서 수술적 요법을 택한다면 상담해 보고 싶은 의사 두 분과 비수술적 요법을 택한다면 만나보고 싶은 의사 두 분을 정했다. 검사 결과가 나오자마자 바로 만나 볼 수 있도록 그중 세 분의 의사 선생님과의 면담을 미리 예약해 두었다. 그중에서 가장 만나보고 싶은 의사가 쓴 책을 주문하여 읽었고 남편에게 주요 내용도 요약해 주었다.

 

비로소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느낌이 들었다. 불편했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처음 진단을 받고 첫 1주일 정도가 심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이유에는 아마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진단은 받았지만 어느 정도의 중증인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여러 자료를 읽으며 공부를 할수록 걱정이 쌓여 갔다. 남편을 설득해가며 새로운 식이요법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뜻이 맞지 않는 남편과의 갈등도 있었다. 그뿐인가. 당시 남편 암의 원인이 스트레스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나는 그렇게 남편과 갈등이 생기는 것조차 걱정되었다. 남편의 눈치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을 삼키기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봤을 때 그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나의 고민과 걱정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때와 도움이 되지 않는 때를 더 잘 구분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고 어차피 잘 알지 못하는 암의 원인을 내가 안다고 착각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신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대비해 준비하고 원인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것들 중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꾸는 데 집중하는 것은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나의 경우에는 "진인사"에 온전히 몰입했을 때 "대천명"도 할 수 있구나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했던 그 모든 일들이 남편의 검사와 치료 결과에 큰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빨리 퍼지는 암이 아니라고 했던 의사의 말이 분명 맞는 말이었을 테다. 아마도 치료 계획은 3주 후 정확한 진단이 나오고 나서 세웠어도 되었을 것 같다. 암이 있는 지 알지 못하고 지낸 세월도 아마 몇 년이나 될 텐데 그깟 3주 더 기다린다고 큰 차이가 있었을까. 의사가 어련히 알아서 검사 일정을 잡지 않았겠는가.


그러고 보니 어쩌면 당시 나의 “진인사”는 그저 불안한 나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에는 “대천명”이 더 중한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아주 오래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더라도 결국은 모든 게 하늘의 뜻이구나 라고 하셨던, 그 옛날의 현인 제갈량님의 말씀이 옳은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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