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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선생 Nov 20. 2023

김치찌개

세상에서 제일 특별한 음식


"엄마, 오늘 저녁 뭐예요?"

"김치찌개" 

"아싸~"


여느 가정에서 흔히 듣기 힘든 대화일 테다. 우리 아이들은 김치가 들어간 것은 무엇이든 좋아한다. 김치찌개, 김치볶음밥, 김치만두.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아이들이 만 7살 9살에 한국 오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 음식에 익숙치 않았다. 아기 때부터 미국 데이케어의 선생님들 손에 키워진 아이들은 한국 음식은커녕 한국말도 잘 몰랐다. 집안일에 서툴고 일에 바쁜 엄마는 요리마저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가며 연명해 나갔었다. 미국 집에서 먹었던 한국 음식은 히스패닉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번역된 레시피를 보고 종종 만들어주셨던 정체 모를 동그랑땡과 생선전, 그리고 엄마가 좋아해서 식탁에 자주 등장했던 된장찌개 정도였다. 


그런 아이들이 한국 생활 3년 후 작년 한 해를 푸에르토리코에서 보내고 인천 공항에 내리자마자 찾은 첫 음식이 김치찌개였다. 아이들과 김치찌개를 먹을 때는 준비할 게 많다. 충분한 냅킨은 필수다. 한국 식당의 작고 소중한 냅킨을 사랑하지만 김치찌개를 먹을 때는 습자지만치 얄팍한 냅킨을 뽑는 손이 무척 바쁘다. 한국을 떠나고 시간이 꽤 흘렀음을 매운 재료가 들어간 식사를 마친 후 수북하게 쌓인 콧물 절인 냅킨의 양으로 짐작할 수 있다. 아이들은 또 금방 이 맛에 적응할 것이다. 이미 지저분한 아이들 티셔츠는 앞치마로 가린다. 식당에서 앞치마를 두를 때에 비로소 한국 온 실감이 난다. 



식사는 무심한 듯 다정하게 탁탁 내려 놓아지는 하얗고 동그란 플라스틱 접시들 소리와 함께 시작한다. 마음은 풍요로워지고 눈은 바빠지는 소리다. 얼마 만에 보는지 모를 어묵볶음, 마늘종 볶음, 멸치볶음, 콩나물, 깍두기, 조미김을 내려놓는 손을 사자가 먹고 남은 사냥감을 떠나기를 기다리는 하이에나처럼 노려본다. 메인 음식인 김치찌개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식탁은 풍성하고 분주한 젓가락질로 입안에서 맛봉오리가 단짠 단짠 박자에 맞춰 춤을 춘다. 


식탁의 내용에는 적응했지만 식사법은 아직 서양식인 아이들은 여전히 반찬, 찌게, 밥 순서로 차례차례 식사를 한다. 친척 집에서 식사를 하면 어른들이 아이들 빈 국그릇을 자꾸 채워 주려 하는 걸 내가 나서서 말려야 한다. 에피타이저인 반찬과 수프인 국을 다 마치고 난 후에 밥만 따로 먹으려는 아이들이 안 그래도 풍성한 식탁에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얹는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아서, 얼마 후엔 어른들이 신기해하는 걸 즐겨서 그러는 줄 알았다. 3년 동안 학교 급식을 먹고 나서도 변하지 않은 걸 보니 그냥 상남자의 고집이다. 마지막에 흰밥만 우걱우걱 먹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불편한 건 보는 어른들의 몫이다. 적당히 식은 보슬보슬 반짝반짝 촤르르한 밥을 입에 한가득 넣고 오물오물 행복한 아이들이야말로 미식가다. 밥맛을 제대로 즐길 줄 안다. 


아이들에게 김치찌개가 유독 특별해진 것은 푸에르토리코에 살면서부터였다. 주변에 한인 마켓과 한국 식당들이 즐비했던 워싱턴 디씨와 달리 푸에르토리코에서는 한인 마켓은커녕 제대로 된 김치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중국에서 온 이민자가 운영하는 아시아 마켓에서 만들어 파는 막김치는 300g쯤 되는 작은 통 하나에 2만 원이 훌쩍 넘었다. 문제는 가격뿐이 아니었다.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알 수 없는 시커먼 색깔과 익숙치 않은 냄새가 수상했다. 그걸 먹느니 차라리 한인 아주머니가 만들어 공급한다는 푸에블로 슈퍼마켓의 김치를 먹겠단 생각이다. 배추 당근채 소금 절임이라 불려야 마땅한 이 김치에는 젓갈이 들어가지 않는다. 소금물에 고춧가루가 스쳐 지나갔다. 현지인의 입맛에 맞춰졌다는 이 김치는 아이들은 그대로는 절대 먹지 않는다. 그나마 절박할 때 꼭 짜서 소금기를 빼고 설탕을 조금 넣어 볶아 먹을 김치 샐러드가 있어서 다행이다. 



한 번도 김치를 만들어 볼 생각은 안 했다. 내게 김치는 주방 경력이 적어도 20년은 쌓여야 감히 시도해 볼 수 있는 난이도 최상의 퀘스트였다. 워싱턴 디씨에서 살 때 리투아니아 출신 회사 동료가 자랑스럽게 자기가 만든 김치 사진을 보여주는 걸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인터넷 레시피를 보고 어렵지 않게 만들었다는 동료의 이야기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동료에게는 레시피로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김치구나. 김치는 어렵다는 편견으로 시도할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내가 돌아봐졌다. 한갓 김치 하나에도 한계 짓고 있는 내 마음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당연하게 불가능으로 치부하고 있을까 돌아봐졌다. 물론 돌아봐졌다고 김치 만들기를 시도했던 건 아니었다. 여전히 김치는 사 먹을 수 있으면 그러는 게 훨씬 수지맞는 일이란 생각이다. 


동료의 김치가 번뜩 생각난 것은 그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나 푸에르토리코의 월마트에서 배추를 발견했을 때였다. 영어로 Napa Cabbage라고 불리는 김치용 배추를 푸에르토리코의 슈퍼마켓에서 발견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마저도 겨울철에만 들어오는 계절상품이라고 했다. 동료가 알려준 망치 아줌마의 막김치 레시피를 검색해 보니 600만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하며 여전히 유튜브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었다.


편견은 사라지고 필요만 남은 나에게는 더 이상 선택지가 없다. 마침 찬장에 한국에서 가져온 멸치 젓갈 한 병과 찹쌀가루 한 봉지까지 위풍당당자태를 뽐내며 나에게 이건 운명이야라며 응원을 보냈다. 태어나 처음으로 만든 김치를 맛보고 나니 도저히 내 자랑을 자제할 수 없어 언니들과의 단톡방에 사진을 찍어 올렸다. 요리 고수 둘째 언니포함하여 다들 때깔도 예쁘다며 김치고픈 막내동생의 하찮은 처녀작에 대고 연민과 격려섞인 칭찬 세례를 보냈다.  




그날 저녁 메뉴는 김치였다. 코스트코에서 발견한 한국 쌀에 가장 가까운 캘리포니아 미들 그래인 쌀로 밥을 잔뜩 짓고 한국에서 공수해온 귀한 조미김 큰 봉지 하나를 뜯고 계란 몇 알을 아이들 좋아하는 식으로 바삭하게 구워 반찬으로 함께 내놓았다. 오랜만에 입에 맞는 김치를 먹으며 즐거운 큰아이가 불쑥 말했다.  


"엄마, 내일은 김치찌개 해 주세요."

"안돼."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답이다. 이 귀하디 귀한 김치로 김치찌개라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아들만큼 귀한 것은 아니라서 얼른 덧붙였다. 


"대신 가끔 김치볶음밥은 해 줄게. 김치찌개는 여름에 한국 가면 실컷 먹어. 여기선 김치가 너무 귀해."  


그날 이후로 아이들에겐 김치찌개가 특별한 음식이다. 김치찌개에는 엄마가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김치가 많이 들어간단다. 내가 젤 좋아하는 김치볶음밥보다도 더 훌륭한 음식임에 틀림없다. 


제주에선 그렇게 특별한 음식을 실컷 먹는다. 오늘 저녁 메뉴도 김치찌개란다. 


"아싸~"





글쓰기 모임에서 쓴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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