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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선생 Nov 27. 2023

내 것

글쓰기 모임 주제 에세이: 부모님께 물려받지 않은 온전한 내 것

글쓰기 모임에서 부모님께 물려받지 않은 온전한 "내 것"에 대해 쓰라는 주제를 받았습니다. 곰곰이 따져보니 부모님께 물려받지 않은 것을 찾기가 참 힘듭니다. 몸도, 성격도, 취향도, 심지어 마음의 모양도... 영향을 받지 않은 것 하나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난하셨던 부모님께 물려받은 재산은 없으니 내가 소유한 재산이나 물건들은 물려받은 게 아니지 않나 잠시 생각했지만 그마저도 부모님이 어렸을 때부터 먹여주시고 키워주시고 대학교 학비까지 보태 주셔서 배운 재주로 번 것들입니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자면 물려받지 않은 건 아닌 듯합니다.


물려받지 않은 것을 찾기는 어렵지만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선택한 내 것을 찾기는 쉽습니다. 돌이켜보면 인생의 중요한 결정은 온전히 내 것이었습니다. 반대를 무릅쓰고 학비에 생활비까지 내가 벌어 다니겠다며 호기롭게 서울에 있는 대학교의 특차 전형에 지원했을 때 가난한 살림이 막막했던 어머니는 절에 가서 제가 특차에 떨어지기를 기도하셨댔습니다. 그다지 열심히 기도하시지는 않으셨던지 저는 상향 지원했던 학과에 붙어서 놀랐고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고 기쁜 자신의 속마음에 놀라셨고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던 큰언니는 난데없는 막내동생 뒤치다꺼리 소식에 놀랐습니다.


말 잘 듣는 모범생 막내딸은 이상하게도 결정적일 때만 반대를 무릅썼습니다. 고질병까지 얻어 가며 공부해서 교사가 되어 놓고는 얼마 가지 않아 갑자기 미국 유학을 가야겠다고 나서질 않나, 미국에선 영어 선생이 밥 먹고 살 길 없다고, 그러니 안 돌아올까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안심시켜 놓고는 석사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에서 더 공부하고 살아야겠으니 한국 교사직을 그만둬야겠다고 하질 않나,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기함했던 일은 까까머리 미국인을 결혼하겠다고 델고 나타났을 때였습니다.


막내딸은 내내 계획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동안의 고집스런 결정들이 모두 이날을 위해 당신들을 훈련시켜 온 이유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리 맘대로 해서 막내딸이라지만 내 자식이 팔다리에 금색 털이 휘날리는 까까머리랑 결혼하겠다 나설 줄은 꿈에도 모르셨던 겝니다.


딸에게서 폭탄선언을 듣고 말을 잃은 아버지는 밤에 몰래 딸의 가방을 뒤지셨습니다. 며칠 후에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찾아 숨겨두려고 하다가 그만 딸에게 들키셨습니다. 아내 몰래 노름과 주식은 잘도 하셨으면서 하필 딸에게는 몰래 하는 게 서툴러서 들키셨습니다.


딸에게 기대가 컸던 어머니는 몸 져 누우셨습니다. 며칠을 끙끙 대면서도 주변에 함부로 상의도 못하겠어서 혼자서 하는 마음 앓이가 심하셨습니다. 막내딸이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신 채 말입니다.


전쟁을 겪으셨던 보수적인 세대의 부모님께 갑자기 결혼 상대를 소개해 준답시고 이 노랑 까까머리 남자를 데리고 나타나면 사달이 날 것이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먼저 언니들을 포섭했습니다. 기나긴 이메일의 오고 감과 결심이 섰을 때의 막내 특유의 확신에 찬 전화 통화로 큰언니를 필두로 한 모든 언니들에게 적어도 반대는 안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그런 사전 작업이 다 이루어진 후에야 방학을 핑계로 방문했던 고향 집에서 미국으로 돌아기 전 단 며칠을 남겨둔 시기에 폭탄을 터뜨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미국으로 떠난 저는 부모님이 마음 추스르시며 생각해 보실 시간을 다음 방문까지 적어도 1년은 확보했습니다. 예상대로 그 시간 동안 부모님은 주변에서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으셨습니다. 몇 다리 건너 아는 집에 국제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자식 이야기도 들으셨습니다. 공부 많이 한 교수 이모부까지 괜찮다고 거드시니 부모님 마음이 쪼금 열리셨습니다. 적어도 조금은 궁금해지셨던 것 같습니다. 머릿속에선 최악을 상상하셨나 봅니다. 1년 후에 아버지 칠순을 앞두고 나타난 까까머리가 큰 절도 하고 한국 음식도 먹고 한국말도 곧잘 하는 걸 보시곤 크게 마음 놓아하셨습니다.


사진관에 가서 칠순 기념사진을 찍는데 까까머리를 사진 속에 넣을 거냐 말 거냐로 가족회의가 열렸습니다. 함부로 말도 꺼내지 말라시던 아버지 등 뒤로 언니들이 눈짓 손짓으로 제게 까까머리에게 제대로 된 옷을 입히라 신호를 보냈습니다. 사진관 구경을 따라나섰던 까까머리가 결국 사진 한가운데 아버지 어머니 등 뒤로 떡 하니 자리를 잡았습니다. 우리 결혼 약속의 징표로 반지도 아니고 빨간 장미도 아니고 아버지 칠순 기념사진이 오갔습니다.   


그렇게 얻은 내 것이 이제는 하나도 둘도 아니고 셋이 되었습니다. 20년 후 남편 칠순 기념사진에는 까까머리가 셋이 떡 하니 자리 잡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칠순 사진 찍을 때만큼 흥미진진하고 스릴 있는 사진은 아닐 겝니다. 하지만 인생은 사진이 아니라 동영상이라 하더이다. 도무지 내 것인지 아닌지 종잡을 수 없는 세 남자랑 사는 매일매일이 흥미진진합니다. 스릴이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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