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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 늘보 Dec 09. 2023

수련원의 고양이

명상 수련원의 수행자 고양이가 홀홀 떠나가며 남긴 메세지

지난 글 <섬광같은 통찰>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아디야 샨티 명상 수련 4일째부터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생생히 깨어있는 가운데 온몸에 에너지가 흐르고 있어 피곤하지도 않았습니다. 밤이던 낮이던 피로할 때 잠시 눈을 붙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생생한 에너지가 넘치며 깨어있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날까지 전혀 잠을 자지 못하는 밤이 이어졌지만 마음에는 지극한 평화와 한없는 사랑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마지막날 새벽, 밤 깊은 시간에 제가 뒤척이는 소리 때문에 룸메이트들이 깰까 봐 숙소 로비로 내려왔습니다. 수련원에서는 시간이 이상하게 흐릅니다. 한밤중인데도 자지 않고 깨어 돌아다니는 사람들이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점심시간에 햇살 내리쬐는 패티오에 천 하나 깔고 누워서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짙은 어둠이 내린 정원과 대조되는 환한 숙소의 로비에는 비어있는 자리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긴 소파를 하나 찾아 비스듬히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개구리 소리와 알지 못할 벌레 소리들이 온화한 밤의 고요한 로비를 잔잔하게 채웠습니다. 맞은편의 소파에 다이어리를 쓰고 있는 여자가 종이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는 모습을 가만히 보는데 가슴에서 온화한 사랑의 느낌이 서서히 퍼지기 시작하여 온 로비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토실한 깜장 하양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로비를 마치 제 집에 들어오는 것처럼 익숙하고 위풍당당하게 걸어들어왔습니다. 낮에 정원에서도 본 적이 있는 고양이였습니다. 사뿐사뿐 우아한 고양이의 움직임이 로비에 앉은 사람들의 이목을 한눈에 끌었습니다. 사람들이 고양이의 주의를 끌려고 손짓을 했지만 움직이는 모습이 딱 수행자 고양이입니다. 관심을 구하고 애원하는 모두의 손길들을 뿌리치고 여유로운 자태로 이리저리 자유롭게 다녔습니다. 고양이를 아주 좋아하는 저 역시 무척 반가웠습니다. 고요한 밤에즐거운 구경거리가 생겨 기쁜 마음이 고양이가 가는 길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습니다.


www.pexels.com


그러다 황송하게도 고양이가 제게로 왔습니다. 귀하신 몸께서 폴짝 뛰어 제가 누워 있는 소파에 올라와서는 비스듬히 누워있는 저의 배 위에 자리를 잡고 몸을 뉘이셨습니다. 작고 소중한 발이 제 몸을 이리저리 누르며 다니다가 배 위에 똬리를 틀었습니다. 따듯하고 보드라운 똬리의 골골 소리를 들으며 지극한 만족감이 마음에서 올라왔습니다. 온몸을 감싸는 감동과 행복이 은은하고 차분했던 마음을 환희로 가득 채웠습니다. 


한참을 배 위의 고양이와 조우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다가온 행복이 행여라도 나를 떠나갈까 걱정되는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스듬히 누운 자세가 불편해졌지만 행여라도 고양이가 떠날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숨도 크게 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마음에 불현듯 아릿한 슬픔 서린 감동이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 조우가 끝날 것임을 알고 있기에, 모든 것이 그러하든 이 행복한 순간도 지나갈 것임을 알기에 나타나는 마음 깊은 서글픔과, 또 그러하기 때문에 더욱 소중한 이 순간에 대한 감동이었습니다. 행복과 서글픔과 사랑과 애절함과 감사와 감동이 오묘하게 섞인 울렁거림 속에 고양이와 함께 잠시 머물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똬리를 틀었던 고양이가 얼마 후 일어나 기지개를 켰습니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나를 그렇게 내버려 두고 수행자 고양이가 홀홀 떠났습니다. 떠나는 그 뒷 모습에 허전한 서운함이 올라왔으나 가지 말라 붙잡고 싶은 애절함도 잠깐 올라왔으나 텅 빈 제 마음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양이는 결코 붙잡히지 않을 겁니다. 제 맘대로 내게 훌쩍 왔듯이 떠날 때도 제 맘대로 훌쩍 떠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가 또 홀홀 사라질 것입니다. 


고양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문득 알았습니다. 수련원에서의 이 황홀한 느낌도 곧 사라질 것이라는 걸.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 완벽한 평화가 드디어 다시 돌아왔으나 이 느낌마저도 곧 사그라들 것이라는걸. 아디야 샨티가 대담 시간에 말한 것처럼 그 어떤 경험도 지속되지 않을 거라는걸... 붙잡으려 할수록 더 빨리 그리고 더 멀리 달아날 것이라는걸... 그 어떤 괴로움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듯이 그 어떤 황홀의 경험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거라는 걸... 


고양이가 유유하게 로비를 지나 어두움이 짙은 정원으로 걸어나갔습니다. 고양이와 함께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서글픔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www.mountmadonna.org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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