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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선생 Jan 16. 2024

나는 울었다

글쓰기 모임 주제 에세이

박사 과정에 갖 입학한 때였다.  아직 집이 구해지지 않아 석사 시절부터 가깝게 지내던 은사님과 같은 학교의 교수인 그 부인의 집에 며칠 머물던 차였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남편과 내가 만나게 된 이야기와 어떻게 나의 부모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은사님이 보시기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남편과의 결혼을 한국의 부모님께서는 처음에 심하게 반대하셨었다는 이야기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결혼 전에 아버지가 내 비행기표를 몰래 숨기려 하셨던 이야기, 아버지 칠순 잔치 사진에 들어가기 위해 언니들의 지휘하에 007작전을 펼쳤던 이야기며, 결혼식을 올리기 전날 남편이 전통에 따라 형부들에게 거꾸로 매달려 발바닥을 맞았던 이야기에, 전통 결혼식에서 던진 닭을 원래는 잡는 사람이 임자인데 아무도 잡으려고 하지 않아서 결혼식이 어수선 해졌던  이야기까지... 우리 결혼 과정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가득했다. 그 이야기들을 반찬 삼아 한참 즐겁게 아침식사를 즐기던 중이었다. 


이런저런 재미난 이야기로 웃음꽃이 가득 찬 식탁에 양념을 얹으려고 내가 불쑥 말했다. 


"우리 엄마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자라면서 한 번도 자기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는데 평생 딱 두 번 자기를 실망시켰대요. 그 첫 번째는 제가 태어났을 때 딸이라서. 그리고 두 번째는 결혼하겠다고 외국인인 남편을 데리고 왔을 때래요. 하하"


우리 엄마가 남편에게 했던 말 중에 재미있고 위트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었기에 내뱉은 말이었다. 어머니에겐 외국인 남편과의 결혼이 얼마나 큰 걱정거리였을지 잘 표현됐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자랑스러운 마음도 있었던 듯하다. 그만큼 내가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은 훌륭한 딸이었단 걸 어필하고 싶었나보다. 지금의 이 화기애애하고 자기 학생들에 대한 칭찬이 가득한 자리에 잘 어울리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게다. 갑자기 그 이야기를 들은 여자 교수의 얼굴이 안타까움으로 일그러질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것 참 슬펐겠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매우 낯선 반응이었다. 뭐가 슬프다는 거지? 엄마는 그만큼 내가 자랑스러운 딸이라 말씀하셨단 뜻인데? 왜 날 동정하는 거지? 왠지 기분이 나빴다. 나의 문화를 이해 못 한다는 생각에 당시 여교수의 반응이 무례하게까지 여겨졌다. 


그리고 나는 그 교수의 반응을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박사도 마치고 다니던 직장도 휴직하고 제주에 살던 어느 가을 날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어느 날 제주의 한 목욕탕에서 엿듣게 된 제주도 아주머니들의 대화 속에서 문득 깨닫게 된다. 


당시 탕 안에 둘러앉은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대화를 한참 주도하고 계시던 게중 가장 나이들어 보이던 여성분은 제주 토박이인 듯했다. 딸만 여럿인 집의 장녀였던 이 분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어머니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셨던 듯했다. 아버지에겐 부인이 두 명 계셨는데 자신의 어머니는 아들이 없어서 자기가 모셔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셨나 보다. 내용을 짐작해 보건대 다행스럽게도 이해심이 많은 남편을 만나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았던 듯 했다. 


그런데 한참 이야기를 듣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아주머니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온통 자기 자랑이다. 자기가 얼마나 어머니에게 훌륭한 딸이었는 지를 끊임없이 강조하는 아주머니는 연신 요즘 세대 사람들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었라고 반복하셨다. 아들이라고 별 수 없다며, 본인의 어머니가 아들이 있었다면 오히려 며느리 눈치 보느라 편안하시지 못하셨을 거란다. 뿐만 아니었다. 자랑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신이 성공적으로 운영했던 식당에 대한 이야기, 아들을 번듯하게 키워낸 이야기, 딸과 사위가 다니는 직장 자랑 이야기... 이 모든 이야기들의 중심에는 자신이 내린 결정들이 옳았고 좋은 선택이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랑 퍼레이드에 이야기를 듣고 있는 다른 아주머니들은 이미 이골이 나 보였다. 다들 참아주고 있는 분위기였다. 


따듯한 탕 속에서 조금 떨어져 앉아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때 갑자기 나의 앞에 드러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주머니 마음속 상처받은 아이의 모습이었다. 그 끊임없는 자랑 아래에 감추어진 자격지심이 그 아주머니의 입을 통해 화살의 모습이 되어 나의 가슴에 꽂혔다. 아주머니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자신 속 아이의 아픔이 나의 마음을 통해 나타났다. 나의 가슴팍이 온통 아리고 찌릿했다. 아... 이 아주머니는 어려서부터 자라면서 아들을 낳지 못한 어머니의 안위에 대한 걱정에 잠을 못 이루셨겠구나. 자신이 아들이 아니어서 괴로웠구나. 


찌릿한 가슴위로 마음 깊은 연민이 드러났다. 더이상 밉지 않은 아주머니의 자랑 아래에 숨은 상처받은 아이가 생생하게 보였다. 그 아이의 아픈 가슴의 통증이 느껴져서 나의 마음이 함께 쓰라렸다. 쉬지 않고 바쁘게 자랑을 계속 해야지 그 아이가 달래지나보다. 아주머니는 여전히 자랑이 바쁘다. 아이를 달래느라 쉴새 없이 분주한 그 아주머니에게 발가벗은 가슴으로 한없는 사랑을 보냈다. 그 두려웠고 서글펐고 온통 애쓰는 삶을 살아왔을 아이에게 온 마음으로 가득한 사랑을 보냈다. 마음에서 울컥하는 사랑이 쏟아져 나와 탕 속의 물을 타고 아주머니에게 가닿았다. 끊임없는 연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며 흘렀다. 울렁 울렁 울렁이는 물과 나와 아주머니가 하나가 되었다


그날 밤에 꿈을 꿨다. 어떤 꿈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꿈속에 한 아이가 등장했음에 틀림없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 앞에 또 다른 상처받은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번엔 내 안에서 살고 있는 아이였다. 어제 목욕탕에서 봤던 그 아주머니의 마음 속 아이와 똑같은 상처를 가진 아이가 어린 내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어렸을 때 주변 어른들이 농담 삼아 내가 태어난 직후 홀트 아주머니가 나와 엄마가 있는 병실을 끊임없이 드나들었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태어나자마자 입양될 위기에 처했던 갓난 여자아이는 고집스런 아버지 덕분에 집에 올 수 있었다고 했다.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에서 외국에 입양된 사람이 나올 때마다 너도 저럴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웃으며 농담하던 주변 어른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80년대 유명했던 아들과 딸 드라마를 보면서 네 밑에 아들이 태어났더라면 너도 후남이 처지가 되었을 텐데 하며 웃어넘겼던 농담도 떠올랐다. 그러다가 15년 전 바로 그 여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그것 참 슬펐겠다."


그렇구나. 나 슬펐구나. 나 참으로 슬펐구나.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어떻게 나는 한 번도 내가 상처받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어른들이 딸 많은 집 여자아이는 해외에 입양이 되어도 크게 놀랄 일이 없는 존재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때 그 많은 오고 가는 이야기들 속에서 어떻게 한 번도 어린 내가 상처를 받았을 거라를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커서 그런 거였을까? 엄마가 나를 홀트 아줌마에게 줘버릴까 고민했을 지도 몰랐다는 사실을 직면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지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나이 마흔 다섯이 넘을 때까지 나는 내 안의 그 상처를 모르고 살았다. 그만큼 가슴 깊이 꽁꽁 묻어두고 심어 두고 가려두었던 상처구나. 나 스스로에게조차 드러낼 수 없었던 상처였구나. 그만큼 아프고 또 아픈 상처였구나. 


아이의 벌어진 상처가 벌건 살갖을 드러냈을 때 나는 울었다. 너무나 아파서 울고 또 울었다. 


전날 그 목욕탕 아주머니에게 보냈던 사랑을 이번엔 나에게 보냈다. 내 안의 상처받은 아이에게 전날과 똑같은 가슴 깊은 사랑을 보냈다. 그것 참 힘들었겠구나. 정말로 슬펐구나...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한없이 따듯하고 서글픈 사랑이 찢어져 쩍 갈라진 가슴 골로 흘러 흘러 들어갔다. 아무리 들어가도 채워지지 않는 그 골짜기에 끊임없이 사랑이 흘러 들어갔다. 끝이 없어 보이던 그 깊은 골짜기가 슬프고 애절하고 따듯하고 시원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졌다. 


사랑이 가슴골을 가득 채우고 넘쳐 흘러 흘러 온 침대를 다 적실 때까지 나는 울었다. 나는 울고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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