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를 권리, 게으르지 않을 의무

2014년 1월에 쓴 글을, 다시 고쳐 쓰다.

by SeungJae Shin

2013년 겨울, 지금은 서로 모르는 사이가 된 누군가가 물었다. "너는 픽사의 영화를 왜 좋아하니?" 그의 질문에 나는 우물쭈물 망설이다 "그냥 좋아. 진짜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지 않아?"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나는 세상에 그냥이란 건 없다고 생각해"라며 담담하게 한마디를 꺼내놓았다. 나의 침묵으로 대화는 중단되었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나는 그저 '정말 그런가' 스스로에게 되물을 뿐이었다.


만약 지금 내게 같은 물음이 주어진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이유를 붙일 수 없는 일이 존재하며, 따라서 그냥이라는 수사가 어울리는 상황도 있다"고. 다들 그런 순간을 한 번쯤은 맞닥뜨려 봤을 테니까. 무언가를 설명하려 할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많고도 많은 단어들이 모두 구차하고 궁색하게 느껴지는, 활자의 바다를 아무리 헤집어 보아도 변변한 조가비 하나 눈에 띄지 않는, 바로 그런 때.


진실이 무엇이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냥 그런 것"을 "그냥"이라는 말에 가두어놓지 않으려는 노력이라 믿는다. 때때로 사람들이 "이유가 없다"라는 문장에 지나치게 숭고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들 중 대다수는 필시 '그냥 = 진짜'라는 등식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애정하는 대상에 대한, 나아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일에 대한 나태라고 생각한다. "그냥"은 "그냥"에서 멈추기 마련이니까.


만약 어떤 이가 나에게 "너는 왜 연애를 하느냐" 질문했다고 치자. 나는 아주 수월하게 "그냥 좋아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 한마디가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어마어마하게 큰 의미가 담긴 응답이라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불성실한 대답이기에 내 감정을, 나아가 연애를 현 상태 이상으로 풍요롭게 만들지는 못한다. 좋으면 왜 좋은지, 어떻게 좋은지, 그 좋음은 어떤 색인지, 어떤 향기가 나고 어떤 맛이 나고 또 촉감은 어떤지에 대해, 명쾌함에 대한 갈증을 느끼면서도 끊임없이 표현하려는 시도를 지속해야만 그 대상이 조금이나마 더 선명해질 테니까 말이다.


물론 세상에는 어떠한 형용사도 무의미한 감정이나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끈질기게 그것을 말로써, 글로써, 음악으로써, 그림으로써 혹은 몸짓으로써 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냥"의 왕좌를 걷어찰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해도, 스텝이 엉키고 꼬여서 기묘한 궤적을 그린다 해도, 수없이 반복되는 삑사리가 민망해 몸서리를 치면서도 기어코 하나의 곡을 완창해낼 때 비로소, 우리에게 저 신성한 '게으를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닐까. 나는 조금 더, 부지런해질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