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프랑소와 트뤼포의 <화씨 451>에 대해 쓰다.
1973년 4월, 히말라야 가르왈 지역의 여인들이 나무를 껴안기 시작했다. 원주민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가르왈에 펼쳐진 드넓은 숲에서 약초와 식량을 얻어왔다. 동시에 숲에 출입하지 않는 기간을 정하는 등 숲의 훼손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통해 자연과 평화롭게 공존해왔다. 1973년 3월 23일, 테니스 라켓 제조회사의 벌목공들과 정부가 "이 지역의 목재는 최대의 수입원이 될 것"이라며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려하자, 마을의 여인들이 각자 나무 한 그루씩을 끌어안아 벌목을 막는 저항을 시작한 것이다. 나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나무가 된 그녀들의 투쟁은 정부로부터 15년간의 벌목금지 조치를 이끌어 냄과 동시에 ‘칩코 운동’이라 칭해지며 비폭력 저항운동의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여기서 ‘칩코’는 ‘껴안다’를 뜻하는 인도어 단어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 <화씨 451>은 개별적인 사고를 할 수 없도록 통제된 전체주의적 디스토피아를 묘사한다. 안테나를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활자 대신 목소리로 크레디트를 읊는 오프닝이 이 사회를 상징한다. 주인공 몬타그는 책을 찾아내 불태우고, 책을 몰래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을 체포하는 일을 한다. 자신의 역할과 자신을 둘러싼 사회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품치 않고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그에겐 승진이 예약되어 있다. 그러던 중 그는 전철에서 “자신이 불태우는 책을 읽어본 적 있나요?”하고 묻는 여인을 만나게 되고, 바로 다음 날 책을 펼쳐든다. 이후 몬타그의 삶은 완전히 변한다.
이러한 ‘빅브라더’형 설정은 1949년 조지 오웰의 『1984』가 등장한 이후 여타 소설과 영화 등에서 애용되어 왔다. 앤드류 니콜의 <가타카>가 있고 커트 위머의 비운의 걸작 <이퀼리브리엄>이 예가 될 것이다. 주제의식을 공유한 이 작품들 중 가장 이른 시기인 1966년에 만들어진 <화씨 451>이 유독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영화 속 저항의 방식 때문이다.
몬타그를 책으로 이끈 여인은 그를 ‘북피플’의 마을로 인도한다. 그곳은 책을 불태우는 사회를 피해 도망쳐 나온 사람들의 공동체다. 그들은 홀로 길을 거닐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는데, 그것은 자신의 머릿속에 온전히 책 한 권을 암기해 넣기 위함이다. 책을 지키기 위해 책이 되는 것. 그들은 본인이 암기한 책의 제목을 스스로의 이름으로 삼는다.
냉소적으로 바라보면 북피플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 했다. 책을 불태우는 사회는 그대로이고,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그저 작은 마을과 언젠가 다시 책을 출판할 날을 기다리며 그것을 외우고 전승하는 나날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서 숭고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들이 좌절하지 않고 온몸으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고 있는 까닭이다.
‘인디포럼 2013 신작 선정의 변’에서 심사위원들은 이렇게 말했다. “영화로 현실에 분노하는 일은 쉬워도 영화로 구체적인 삶의 생기를 발견하고 껴안는 일은 쉽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사회의 시스템을 뒤엎는 혁명을 꿈꾸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는 이들의 외침에선 언제나 위태로움이 느껴진다. 이는 구조의 거대함과 강력함에 대한 떨쳐버릴 수 없는 두려움에서 기인할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거대한 혁명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실에 허탈해하고 절망해 있고 싶지는 않다. <화씨 451>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혁명은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용기를 준다. 적어도 내 눈에 비친 이 영화는 가르왈의 여인들과 같은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