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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Feb 13. 2020

#71. 정수기도 양심이 있을까

2020.02.13.

회사에선 물을  많이 마신다. 하루 평균 2리터 정도는 족히 마시는  같다. 건강이나 미용을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별생각 없이 그냥 마신다. 아마 입사 초기 점심을 자주 거르면서 허기를 달래기 위해 물을 마셨던  어느덧 습관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자연히 정수기를 마주할 일도 많다. 회사에는 정수기가   있는데 나는 주로 오른쪽 정수기에서 물을 받고는 한다. 왼쪽 정수기의 물통은 회색과 누리끼리 사이의 오묘한 색감이 돌아 낡아 보이고, 오른쪽 정수기의 물통은 새파래서  신선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오른쪽 정수기에서 물을 받고 있었다. 허리를 굽힌  점점 차오르는 물을 보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히 물통은 동일한 상태로 배달이 오는데  설치만 하면 서로 다르게 보일까. 정수기 자체도 같은 업체에서 같은 빈도로 같은 정도의 관리를 받을 텐데 말이다.

허리를 펴고 곰곰 살펴보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왼쪽 정수기 또는 왼쪽 정수기에 꽂힌 물통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왼쪽 정수기는 조명 바로 아래에 있고 좌측에   남짓한 공간이 있다는 , 오른쪽 정수기는 비교적 조도가 낮은 데다 우측에 커피 머신이 바로 붙어있다는 점이 차이였다. 본질이 같아도 놓인 위치가 다르면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보이면 다르게 느껴진다는 사실. 정수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은  그럴 것이다. 대개 눈으로 확인되는 것들이 상대가 어떻게 보이는지를 결정하고 그것에 비추어 누군가를 인식하게 된다. 억울하다면 억울할  있지만 딱히 부조리하다 여겨지지는 않는다. 어쩔  없는 노릇 아닌가 싶다. 그리고 피상적이다 여기는  모든 것들이  우리를 구성하는 요소일 테니까, 그것만으로 내가 판단된다고 해도 그게  틀린 것만은 아닐 테다. 진실은 아닐지언정 사실일 수는 있다고 표현하면 적당할까. 그저 우리에게 가능한 부분은 사실보다는 진실을, 단어가 적절한 지는 모르겠지만, 바라보려는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겠다.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논할  내가 즐겨 쓰는 예시가 있다. 한국의 거리에서는 장애인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사실이다. 한국의 거리에서 장애인을 찾아보기 힘든 , 장애인 이동권을 포함해 그들을 위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아서다. 이건 진실에 가깝다. 그러고 보면 결국 중요한  질문이다. 이건  그런가, 어째서 그런가,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가, 등등.

점심시간을 이용해 후암동 거리를 거닐며 사진을 찍었다. 후미진 골목이 많은 곳이다. 그곳에서 낙서 하나를 발견했다. “가난한 사람이  양심 없더라 그러니 가난한겨누가 어떤 마음으로 썼는지는  갈이 없다. 이것은 이것을  당사자에게 사실일 수도 있고 진실일지도 모른다.   아니지만 부러 위악적인 문구를 남겨놓았는지도 모른다. 사연이 있겠거니, 하며 카메라에 담고 발길을 돌렸다.

다시 이런 질문이 되돌아온다. 이걸 찍는 나는 무슨 마음일까. 이렇게 공개된 공간에 올리는 것은  무슨 마음일까. 배가 고파서 그런가, 판단이  서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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