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6
은호에게 나는 3순위다. 1위는 엄마, 2위는 할아버지. 셋이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아 “은호야, 이리 와!”를 외치면 은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엄마에게 달려간다. 엄마가 없다면?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할아버지,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의 품에 안긴다. 그야말로 다이빙을 하듯 첨벙-하고.
넘버쓰리란 사실이 서운치는 않다. 납득이 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은호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은호와 함께 있을 때 그는 정말로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으며, 은호의 모든 요구를 기꺼이 받든다.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로.
그러니 어린이집 등원 시 나에겐 별 미련 없이 세상 쿨하게 등을 보이는 은호가, 할아버지의 바짓가랑이는 번번이 붙잡으며 목놓아 우는 것도 자연스럽다. 아버지는 은호가 그에게 돌려주는 애정이 어찌할 바 모를 만큼 흐뭇한 모양으로, 은호를 품에 끼고 있을 때 그의 표정에선 행복이 흘러 넘쳐 콸콸 소리마저 들릴 지경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누나와 내 앞에서 그런 얼굴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참, 한 길 사람 속이 이리도 깊고 복잡다단함을 체감하고 있다. 이번에도 서운함은 없다. 우리 아이에게 무한을 내어주는 그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외려 은호를 바라보는 눈빛이 내게 향하는 상황을 그려보면 좀 민망해져서 손을 허공에 휘휘 젓게 된다. 숨길 수 없는 경상도 부자지간이라고나 할까.
평탄치 못했던 그의 역사도 섭섭함을 느낄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조실부모하고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이주, 홀로 육남매를 건사하고 가정을 꾸리며 가난과 싸우느라 자식사랑에 쏟을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달리기를 취미로 삼는 나와는 다르게, 그의 삶은 그 자체가 달리기였을 테니. 호흡을 가다듬고 풍경에 눈을 돌리는 여유 따윈 주어지지 않는 그런. 뭐, 자식을 우쭈쭈하는 부성을 힐난하던 시대적 분위기도 한몫했을 것이고. 대신 윤택함을 물려주려는 뜀박질로 모든 표현을 대신했으리라.
감정을 떠나 아버지를 보며 자주 하는 생각은 이런 것이다.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하듯이, 누구나 사랑을 주고 싶어하는 구나. 그도 언제든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사랑하고 아낄 준비가 된 사람이었구나. 어쩌면 받는 일 이상으로 주는 일이 더 큰 희열을 낳기도 하겠구나.
수민이는 그런 아버지와 내가 똑 닮았다며 웃는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하며, 밥 한 술이라도 더 먹이려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은호의 뒤를 졸졸 좇는 자세하며. 하하,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릴 적에 그와 같은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습관처럼 다짐했었는데. 눈 떠보니 이리 되어 버렸네.
막상막하로 과묵하고 늘 무표정에 살가움이라곤 전무하던 내 변한 꼴을 보고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할까. 고놈 참 유난이네, 하는 생각? 피는 못 속인다. 너 그거 다 나한테 배운 거란 생각? 극적반전이 새삼 쑥스럽지만, 곰곰 되뇌어보면 역시나 감사한 일이다. 생의 무게는 덜어두고 마음껏 있는힘껏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을 내게 준 것이 그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스스로를 보면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만약 누나와 내가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당신의 아비가 살아있었다면, 그도 지금의 자신처럼 손주들을 끔찍이 아껴주었겠지, 골똘해본 일이 있을까. 그런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즐거운 상상이었을까 아님 서글픈 어떤 것이었을까. 부러 묻진 않아야지. 미결로 남겨두는 편이 나은 의문도 있는 거니까.
수민이가 아버지와 나 두 사람이 똑같다고 평하는 게 하나 더 있다. 수십 년째 매일 새벽 산을 타는 아버지와 달리기를 하러 산으로 갈 틈을 호시탐탐 노리는 나. 허허, 부인할 도리가 없네.
그렇다면 이런 계산도 가능하지 않을까? 훗날 은호가 아이를 갖게 된다면, 못해도 내가 넘버투쯤은 될 수 있겠다는 희망찬 계산! 또 모르지, 언젠가 한참 어린 달리기 파트너가 생길지도. 가끔 이렇게 앞서가는 것도 누굴 닮아 이런 거겠지,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