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02
은호는 할아버지를 부르며 운다. 달리다 꽈당 넘어졌을 때, 엄마 손에 들려 진실의 방으로 끌려갈 때, 아빠가 아이스크림을 뺏어 먹을 때, 은율이가 장난감을 들고 도망갈 때. 은호는 할아버지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사전에 거절이란 없는 사람. 언성을 높이거나 얼굴을 붉히지 않는 사람. 무릎과 발이 퉁퉁 붓고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어부바를 멈추지 않는 사람. 태어났을 때부터 주욱, 아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자신을 세상 가장 소중한 존재로 여겨 준 사람. 은호의 하삐,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
애정에 대한 보답이 확실한 은호. 무얼 하고 있든 할아버지가 눈에 띄면 달려가 일단 안기고 본다. 아버지는 그게 어찌할 바 모를 정도로 흐뭇한 모양으로, 은호를 품에 끼고 있을 때 그의 얼굴에선 행복이 파도를 친다.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하듯, 사랑을 주고도 싶어 하는구나.
아버지에게 은호가 해방이었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십 대의 나이에 조실부모하고 대도시로 이주, 홀로 육남매를 건사하고 가정을 꾸리느라, 사는 동안 내내 가난과 싸우느라 사랑을 받는 법도, 주는 법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던 사내.
언젠가 고모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아버지가 동생들이 속을 썩이면 태우지도 못하는 담배를 물고 마당에서 한숨만 푹푹 쉬었다는 이야기. 듣자 하니 한눈에 반한 엄마에게 말은 못 붙이고 퇴근길 버스만 졸졸 따라 탔다더니. 그랬던 그가 이젠 사랑의 중심에 있네.
수민이는 그런 아버지와 내가 똑 닮았다며 웃는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하며, 밥 한 술이라도 더 먹이려 천방지축인 아이들을 졸졸 좇는 자세하며. 그와 같은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많이도 다짐했었는데, 눈 떠보니 이리 되어 있었다.
스스로를 보며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할까. 만약 누나와 내가 자라는 동안 당신의 아비가 계셨다면, 그도 손주들을 끔찍이 아껴주었겠지, 골똘해 본 일이 있을까. 그렇다면 그건 즐거운 상상이었을까 아니면 서글픈 무언가였을까.
“우리 주스 먹을까? 좋아!” 묻고 답하기를 동시에 해버리는 은호. 할아버지에게 배운 게 틀림없는 저 “좋아!” 소리. 좋다, 좋아.
언젠가 만화방에 삼대가 함께 간다면, 그때도 아버지는 아이들만 보겠지.
2026.04.02
*2024년 10월의 글을 2026년 4월에 고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