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오감을 자극하는 맛있는 영화 이야기, 여기는 영화식당입니다”
2012년 12월의 어느 새벽, 시각을 짐작할 길 없는 골방에서 처음으로 인사를 건네던 때를 기억한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1200일이 넘도록 만들어가고 있는 팟캐스트 ‘영화식당’의 첫 녹음 날 말이다. 삶이라는 항로에서 나침반 없이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표류하던 이들의 의기투합이 빚어낸 저 한 마디는 서서히 뗏목으로 나룻배로, 어느덧 조그마한 방주 한 척이 되어 꽤나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싣고 나아가고 있다.
날씨가 바다의 준엄한 규율이라면 우리는 무법자. 눈이 얼얼할 만큼 햇볕이 쏟아지는 쾌청한 날에도, 호크아이의 시력마저 침침하게 만들 악천후에도 우리의 항해는 멈추지 않는다. 베이스캠프는 언제나 망원동의 성미산 마을극장 지하 1층. 넉넉잡아 세 평 남짓한 지하 공간에서 닻을 올리고 노 대신 마이크를 잡는다. 하나의 영화에 대한 끝 모르는 해석들을 품은 채 배에 오른다.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우리는, 우리만의 별자리를 해수면에 새기며 대양을 유랑한다. 목적지는 없다. 해적왕이 되려 하는 자도 없다. 그저 꿈꾸듯 유영하는 이 순간을 즐길 따름, 이었는데.
‘80일간의 세계일주’라는 원피스를 찾아 나서자며 모두를 설득한 것은 ‘제임스’. 원더랜드가 고향인 그는 본디 여행을 사는 사람. 서른 넷이 된 올해 문득 돌아보니 오로지 여행으로 가득한 나날들이었다던가. <섹스 앤 더 시티>로 익힌 영어와 타고난 쾌활함은 세상 어디에서도 그를 외롭게 만들지 않았다. 지도를 슬쩍 훑기만 해도 길을 단박에 꿰뚫는 능력은 선천적 재주. 질풍노도의 시기 한없이 동경했던 장국영의 흔적을 따라 하염없이 걷고만 싶은 그는, 사랑이 전부라는 낭만주의와 우수에 찬 외모마저 ‘꺼거’를 닮았다.
“그래서 구체적인 계획이 뭔데?” 일갈하며 노트를 꺼내 든 이는 ‘관석’. 위키피디아를 내장했다 해도 껌뻑 속을 정도로 박학다식한 그는 종교학을 전공했다. 카메라를 손에 쥐고 종교의 발원지를 좇는 여행을 하던 중, 신부님의 꼬임에 빠져 캄보디아의 한 보육원에서 장장 2년 8개월을 체류했다. 아이들, 그리고 잊혀 가는 세계의 면면들을 사진첩에 갈무리했던 낮, 하릴없이 영화를 보았던 밤들이 그를 영화식당으로 인도했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최후의 성전이 펼쳐진 페트라 알 카즈네를 두 눈에 담고자 팔을 걷어 부쳤다.
정적을 깨는 카랑카랑한 ‘알리스’의 목소리. “유럽이 최종 목적지라면 칸으로 갈래요”란 그녀의 선언이 더딘 진행에 추진력을 부여한다. 알리스는 대학생 때 문학과 예술공학을 공부했고, 남는 시간엔 한국으로 유학 온 외국인 학생들의 정착을 돕는 코디네이터로 일했다. 우연한 기회에 인도로 넘어가 다큐멘터리를 찍었고, 곧 등장할 또 다른 멤버 우주와 단편 영화를 제작했다. ‘기술과 사람을 잇는 미디어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 호기롭게 대학원에 진학한 그녀는 최애 감독 자비에 돌란을 만난다는 상상을 현실로 맵핑하고자 한다.
영화식당의 막내 ‘우주’ 역시 자비에 돌란과의 조우를 기대한다. 그녀는 현재 스물 셋, 예술공학과 프랑스어를 전공하며 쉼 없이 소설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있다. 영화관, 영화제 덕후이기도 한 우주는 방문하는 도시의 가장 오래된 영화관에 들러 관계자를 인터뷰하고, 각양각색의 영화제로 발품을 팔았다. 한 공공기관의 지원을 받아 소규모 영화제를 몸소 기획했을 땐 스크린에 올릴 작품을 선정하기 위해 삼백 편이 넘는 단편 영화를 몰아 봐야만 했다. 순둥한 얼굴, 읊조리는 말투와는 별개로 그 누구보다 담대한 그녀는 훗날 감독 자격으로 초청될 칸 영화제로 사전 답사를 떠날 요량이다.
마지막으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털보’는 굳이 말해 영화식당의 선장. 어영부영 시간을 낭비했더니 어쩌다 서른이 된 그는 홍보회사에서 연일 코피를 쏟으며 돈을 벌고 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속박했던 굴소년 시절을 영화에 기대 버텨냈고 팟캐스트를 만들며 가까스로 사회화에 성공했다. 나무늘보라는 별칭에 걸맞은 느긋한 품성으로 언제나 개성 강한 이들을 중재한다. 성격과는 달리 익스트림 스포츠에 열광하는 그가 두바이 행을 지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 동시에 그는 어릴 적 넋을 빼놓았던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압도적인 풍광을 마주하기를 소망한다.
지원서 용으로 수정하기 전 초안. 똑똑한 동생들의 조언에 따라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는 글로 고쳤지만, 난 이게 더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