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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Sep 10. 2019

#9. 유치한 다짐을 해봤다

2019.09.10.

야근을 했다. 따릉이를 타고 집에 돌아와 씻고 얼굴에 팩을 붙이고 책상 앞에 앉으니 어느덧 시간이 밤 11시 20분이다. 그나마 집이랑 회사가 가까워서 천만다행이라는 안도가 밀려온다. 동시에 아마도 아직 집에 도착하지 못했을 동료가 못내 마음이 쓰인다. 결혼을 한 달 앞둔, 최근에 집안에 달갑지 않은 일이 생겨 경황이 없을, 늘 골골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일에 철두철미한 인천의 딸, 내 팀장이.


나보다 한 살 위인 그녀와 함께 일하게 된 건 2017년 7월부터다. 원래는 서로 다른 팀 소속이었는데 당시 조직개편을 거치면서 한 팀이 되었고, 여태껏 여러 클라이언트를 공동으로 담당하고 있다. 돌아보면 참으로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깨지기도 숱하게 깨지고, 가끔은 개기기도 하고, 그녀가 나를 어르고 내가 그녀를 달래고, 못 해먹겠다와 그래도 해보자를 거듭하다 보니 어느덧 2년이 넘게 흘렀다.


사실 그녀에 대한 회사 내의 평판은 그리 좋지 못한 편이다. 그녀를 직접적으로 겪어보지 않은 이들에게서 더 그러하다. 일에 있어서 출중함을 자랑하지만 대내적인 커뮤니케이션이나 감정을 표출하는 방식이 오해를 사기 쉬운 타입이이기는 하다. 목소리도 돌고래처럼 천장을 찌르는 톤이라 더욱 주목을 사는 측면도 있다.


나 역시 그녀를 미워했던 적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특히 호흡을 맞추는 첫 일 년은 칠갑산급의 질곡이었다 할 만하다. 진입장벽도 높고 공부할 것도 많은 업계에 처음으로 입문하는 나, 안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이거 가르치랴 저거 지시하랴 그거 피드백주랴 속 터지고 박 터지는 그녀. 게다가 우리는 일하는 스타일도 생각하는 방식도 극과 극이었다. 그러니 피곤하지 않을 수가 있나. 물론 실력의 갭이 가장 큰 문제였겠지만.


그녀와 어느 정도 친분을 쌓은 뒤 우리가 왜 이리 다를까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여러 가지가 거론되었지만 결론은 이것이었다. 팀장님 이과, 나는 문과. 명확한 논리 구조를 바탕으로 즉문즉답을 토해내는 공식을 통해 세상을 헤쳐 나가는 그녀와, 기승전결을 사랑하고 스토리라인에 천착하는 내가 예열도 없이 한솥밥을 먹게 되었으니 밥상머리가 요란할 수밖에.


그래도 요즘은 그녀가 밉지 않다. 지난주  그녀에게 청첩장을 받았을 땐 가슴 한편이 뭉클하기까지 했다. 내가 제시간에 일을 처리하지 못한 탓에 웨딩촬영 전날에도 새벽까지 야근을 하고, 사내에서 내 능력과 태도에 대해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나를 변호하고, 일상처럼 링거를 꽂고 코피를 흘리면서도 끝끝내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고, 업무 상 위기가 닥치면 늘 앞장서서 뒤치다꺼리를 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몽글몽글함을 안고 유치한 다짐을 하나 해본다. 축의금을 쎄게 하겠다는, 뭐, 그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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