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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Sep 10. 2019

#10. 마이너스 말고 플러스였기를

2019.09.10.

스탠드업 코미디를 좋아한다. 말을 재미있게 잘 하는 이들에게 꼬마 때부터 매력을 느껴왔던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혈혈단신 무대에 서서 오직 언변과 몸짓으로 좌중을 뒤흔드는 그들에게서는 뭐랄까, 비장미와 숭고미가 절묘하게 결합된 골계미가 느껴진다. 언젠가 한 번은 나도 저곳에 서 봐야지, 하는 욕심이 생길 정도다.


주로 미국의 스탠드업 코미디쇼를 감상해왔었는데, 실제로 처음 직관하게 된 곳은 공교롭게도 일본이다. 지난 7월 초 오키나와에 여름휴가를 다녀왔는데, 첫날에 바로 토카시키지마라는 조그마한 섬에 들어가는 일정이었다. 항구에 도착하니 바로 직전에 배가 떠났고 다음 출항까지 여섯 시간 정도가 남은 상황. 하릴없이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스탠드업 코미디가 펼쳐지는 공연장이 눈에 띄었다.


일본어를 그럭저럭하는 편이지만 과연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말 그대로 남는 게 시간인데 못 알아들으면 어떤가 하는 의욕이 시소를 탔다. 고심하던 중 그곳의 문하생 또는 연습생으로 보이는 분이 다가와 적극 권하기에 “한국인이라 걱정이지만…, 볼게요, 고마워요.”하고 못 이기는 척 티켓을 구입했다. 사실 결론은 정해져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보거나(See), 봤거나(Saw) 사이의 망설임이었으니까.


일찌감치 맨 앞에 자리를 잡았다. 두리번거리다 보니 어느새 장내가 가득 찼다. 시작이 다가오자 사전 MC 역할을 담당하는 코미디언이 나와 관람 에티켓을 비롯한 여러 가지를 안내했고 곧 막이 올랐다. 60분을 일곱 팀이 꽉꽉 채웠고, 거짓말 하나도 보태지 않고 정말 웃겼다. 특히 현상수배범과 형사가 티격태격하는 상황극을 펼친 팀의 연기가 대단했다.


예상외로 내가 그들의 말을 너무 많이 알아들었다는 데에 놀랐다. 물론 대사가 대부분 다 일상적인 용어들로 구성되었고 단어의 뜻을 몰라도 충분히 유추가 가능할 만큼 담백한 스토리라인 덕을 톡톡히 봤다. 그래도 억지로 따라 웃거나 홀로 멀뚱멀뚱하지 않을 수 있어 어찌나 뿌듯하던지.


그날이 특별했던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공연이 끝난 뒤의 일이다. 공연장 근처의 벤치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조금 전에 최선을 다해 관객들을 웃겼던 커다란 덩치의 두 사람이 조그마한 도시락을 손에 쥐고 건너편 벤치에 앉았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우연찮게 엿듣게 된 대화의 내용은 그들의 큰 몸집을 짓누르기에 충분해 보였다.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에서보다 코미디언의 사회적인 위상이 높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인지, 아니면 아직 충분히 유명하거나 권력이 있지 않아서인지, 아무튼 안쓰러운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더 듣지 말아야겠다 싶어 이어폰을 끼려는데 그들이 나를 알아보고는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이 아닌가.


공연은 재미있었냐, 묻길래 사실 나 한국인인데 그래도 재밌었다, 답하니 호들갑을 떨며 다음 달에 단독 공연을 하는데 그때도 일본에 있느냐 묻더라. 아쉽지만 그렇지 않다고 했더니 격하게 비명을 지르고는 고맙단 말과 팸플릿 한 장을 남기고 돌아섰다. 아주 발랄한 발걸음으로.


둘의 팀명은 ‘플러스 마이너스’. 이름 참 잘 지었다는 생각과 동시에 이 순간이 꽤나 오래도록 기억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지금쯤이면 단독 공연을 마쳤겠다. 어땠으려나. 부디 플러스였기를. 어떤 의미에서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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