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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Sep 20. 2019

#16. 기록적인 하루였기를

2019.09.19.

일기를 쓰려고 앉았을 때 마땅히 쓸 거리가 생각나지 않는 것은 조금 쓸쓸한 일이다. 물론 무어라도 쓰자면 쓰겠지만, 예컨대 오늘 내가 무얼 했고 무얼 먹었고 무얼 봤는지 등등, 어쨌거나 공개된 공간에 게시하는 글이라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그래도 남들이 좀 읽을만한 걸 써야 하지 않나, 하고 말이다.


일기를 쓰려고 앉았을 때 보고픈 얼굴들이 떠오르는 것은 퍽 멋진 일이다. 지금 누구는 마피아 게임을 하고 있을 것이고 다른 누구는 코노에서 한창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술을 마시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일기를 쓰려고 앉았을 때 해소되지 않은 분노가 밀려오기도 한다. 그러면 그건 그냥 고이 접어둔다. 부정적인 에너지에 집중하고 싶지 않다. 부러 그것을 전시하고 싶지 않다. 그런 건 스스로 판 굴에 틀어박혀 살았던 10대, 20대 때 충분히 했다. 이젠 가능한 좋은 마음을 유지한 채로 살고 싶다.


일기를 쓰려고 앉았을 때 배가 고파 오면 난감해진다. 대개는 밤 열한시가 넘은 시점이고 끊으려고 결심한 바는 없지만 수년 전부터 야식을 먹지 않는 습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참거나 물을 마시거나, 그래도 힘들면 과일 또는 요거트로 요기를 한다. 식탐이 많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일기를 쓰려고 앉았을 때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노란 조명이 좋다. 침대 옆에 놓인 스탠드의 고개를 책상 쪽으로 돌리고, 나는 그 빛을 등지고 앉는다. 그러면 책상은 밝아지고 왼쪽 벽에는 커다란 내 그림자가 자리를 잡는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맥북 모니터 아래로 까만 것들이 꿈틀꿈틀하는데, 그게 종종 조그마한 동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일기를 쓰려고 앉았을 때 한 번씩 내 방을 스윽 둘러보기도 한다. 책, 책장, 책상, 화장대, 화장품, 에코백, 스탠드, 침대, 베게, 아령. 익숙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끔은 창 너머로 달이 보이기도 하는데, 사실 별다른 감흥을 느낀 적은 없는 것 같다. 뭐, 난 손오공이 아니니까.


일기를 쓰려고 앉았을 때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마롱이의 소리 컬렉션은 늘 반갑다. 이방 저방 옮겨 다니는 발자국 소리와 물을 마시는 소리, 누울 자리를 마련하며 뒤척이는 소리, 이따금 문을 열어 달라며 내 방문을 손으로 긁는 소리. 어쩌면 그는 내게 소리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일기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누울 때 오늘도 고생했다는 말을 건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이토록 평범했던 하루를 기록할 가치가 있는 날로 만든다. 부디 오늘이 모두에게 기록적인 하루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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