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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Sep 19. 2019

#15. 자전거 생활자의 하루

2019.09.18.

자전거 생활을 내 나이 스물다섯에 시작했다. 당시 강서구 가양동에 살았었는데, 한강변이 집에서 5분 거리여서 큰맘 먹고 자전거를 구입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티티카카에서 나온 하얀색 모델이었다. 최근 출시되는 미니벨로 보다 바퀴는 조금 더 크고 디자인은 별 특색 없이 심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3년 정도 닳도록 타고 다녔던 그 녀석과는 어느 날 안장을 도둑맞으면서 이별을 고하게 되었다. 세검정에 있는 육교 아래 자전거를 묶어 뒀는데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오니 오직 안장만이 사라져 있었다. 라이트도 아니고 벨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퀴도 아니고 하필이면 안장이라니. 순식간에 탈 수 없는 탈것이 되어버린 녀석의 몰골은 뭐랄까, 손모가지가 날아간 타짜를 연상케했다. 묻고 더블로 가기는커녕 개평도 못 받고 쫓겨나야만 하는, 그런.


매사에 대체로 시큰둥하고 물욕도 별로 없던 나도 자전거에만큼은 순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올림픽대로가 막히든 마포대교가 무너지든, 언제나 나의 다리가 되어준 녀석을 꾸역꾸역 집으로 끌고 왔다. 그 과정에서 깨닫게 된 건, 물리적으로 사라진 것은 안장뿐이었으나 이미 녀석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는 사실이었다. 이젠 녀석을 보내줄 때다, 이게 내 결론이었다.


고심 끝에 결정한 다음 파트너는 클래식 자전거였다. 이름은 브리티시 클래식, 하고도 블랙. 티티카카가 화투였다면 이 녀석은 한없이 포커에 가까운 외관을 자랑했다. 매끈하게 잘 빠진 보디에 세련된 블랙, 실버, 브라운 컬러의 조화. 게다가 상체를 꼿꼿이 펴고 달릴 수 있어 승차감도 훌륭했다. 화란아 안녕, 이젠 정마담에게 갈게.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브리티시 클래식의 자리를 빼앗은 것은 다름 아닌 서울 공공자전거 따릉이다.  사실 자전거로 통학/통근을 하는 일은 많은 번거로움을 동반한다. 솔직한 심정으로 타고 나왔던 자전거를 버리고 싶어지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자전거를 동반하기 곤란한 곳을 방문한다거나, 급히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거나, 몹시 피곤하거나 등등. 따릉이는 그런 불편함을 해소해줬다. 게다가 정거장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특히 나의 생활 반경 내에서, 나는 점점 더 따릉이에게 종속되었다.


브리티시 클래식은 그렇게 집 베란다에 먼지 쌓인 채 방치되어있었다. 천일이 넘는 시간이다. 그동안 부모님은 내게 수차례 녀석을 처분할 것을 요청했고, 침묵으로 일관하던 나는 결국 결단을 내리기에 이르렀는데 그게 바로 지난주다.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고, 연휴 기간 중 잠시 회사에 들를 일이 있어 녀석을 타고 와 회사 옆 자전거 정류장에 묶어둔 것이다. 그땐 몰랐다. 그가 나를 구할 줄은.


오늘도 야근을 하고 아홉시 반쯤 퇴근했다. 회사를 나오면서 앱을 켜보니 반경 300미터 이내에 따릉이가 단 한 대도 남아있지 않았다. 페달을 좀 밟으면서 생각도 정리하고 스트레스도 날려버리고 싶었는데, 그게 정말로 간절했는데. 눈물을 머금고 다이를 외치려던 찰나, 히든카드가 떠올랐다. 결과는, 일발역전.


녀석은 지금 무악재역 근처 정류장에서 잠을 자고 있다. 만약 내일 아침에 따릉이가 없다면 나는 그와 출근길을 함께하게 될 것이다. 내일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곧, 그리될 것이다. 너 나하고 전생에 인연이 아주 깊구나, 고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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