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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Sep 18. 2019

#14. 황망하게 황망하다

2019.09.17.

더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택시를 불렀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꽤나 장거리를 가는 콜이었기에 금세 택시가 잡혔다. 다행히도 기사님은 매너가 좋은 분이셨다.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창문을 내리는 것을 보시고는 에어컨을 틀어주셨고, 집까지 아주 조용하고 안전하게 나를 데려다주셨다. 하루의 맺음을 상쾌하게 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안도가 밀려왔다.


자동으로 결제가 되는 시스템이었기에 목적지에 당도한 나는 최종 요금을 확인한 뒤 별도의 요금 지불 과정 없이 꾸벅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기사님은 “조심히 들어가세요.”라는 나지막한 한 마디도 잊지 않으셨다. 감사합니다, 얕게 읊조리며 엘레베이터로 향하는 찰나 요금이 결제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28,900원. 내 기억보다 200원이 더 높은 금액이었다. 황망했다.


불현듯 7년 전 동남아 3개국을 여행할 때의 일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툭툭 기사나 노점상의 상인들이 내게 가벼운 사기를 치는 것을 알면서도 군말 없이 돈을 지불하고 다녔었다. 그들이 무서워서는 아니었고, 이 정도는 당해 줘야 여행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한 지 이주 정도가 지났을 무렵 누군가 내게 말했다, 그러지 말라고. 나의 그런 태도는 정직하게 일하고 양심적으로 돈을 벌고자 하는 현지인들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고 여행지의 경제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건 그들을 위한 배려가 아니고 나의 무지이자 오만함의 발로라고. 그때도 참, 황망했다.


택시 안에서 나는 뜬금없이 예전엔 꽤 친했던 고등학교 동창이 쓴 기사를 검색해보고 있었다. 한때 군소 진보 정당의 열성적인 지지자였던 그는 몇 해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매체명과 이름을 검색하니 현 정부의 최저임금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가 최상단에 노출된다. 그는 ‘최저임금 1만 원’을 국내 최초로 주장한 집단의 일원이었다. 하마터면 황망할뻔했다.


‘황망하다’는 본래의 의미와 다르게 사용되는 대표적인 단어 중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황망하다’를 황당하고 허무하다, 허망하다 등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쓰는데, 사전을 찾아보면 ‘마음이 몹시 급하여 당황하고 허둥지둥하는 면이 있다.’라고 나온다.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조금 황망한 기분이 되었는데, 그때의 황망함이 전자였는지 후자였는지 아니면 둘 다 혹은 둘 중 어느 것도 아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200원은 기사님에게 어떤 의미일까. 만 원은 옛 친구에게 어떤 의미일까. 내게는 또 어떤 의미일까. 황망해서인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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