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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Sep 23. 2019

#17. 뱃사람이 된 저녁

2019.09.23.

환절기에 취약한 편이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타고나기를 기관지를 약하게 타고난 탓인지 공기가 차가워질라치면 귀신같이 몸이 먼저 알아채고 으슬으슬 댄스에다 콜록 훌쩍 에취 추임새를 넣는다. 평소보다 약간 달아오른 채로. 올가을도 예외는 없어서 일주일이 다 되도록 감기가 떨어질 줄을 모른다.


어제는 올봄에 합류한 연희동 소재의 농구팀 BBTS의 수장이자 내가 존경하는 만화가 중 하나인 K형의 생일 파티가 있었다. 나는 고작 치킨 기프티콘 하나와 축하 메시지를 보냈을 뿐인데 형에게 소고기에 술까지 엄청나게 얻어먹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팀원들과의 대화도 즐거웠다. 몸이 괜찮았다면 끝까지 놀았을 텐데 3차로 향하는 길목에서 발걸음을 돌린 게 못내 아쉽다.


진작에 약을 먹을 걸 그랬다. 늘 후회한다. 그리고 그걸 반복한다. 약 먹는 게 싫고, 그보다 약국이나 병원을 방문하는 게 너무나 귀찮다. 하지만 이제 그만 어리석을 때도 됐다 싶기도 하고, 다가오는 주말을 대비하기 위해 오늘 큰 결심을 하고 약을 사 먹었다. 오후 세시쯤 한 번 먹었고, 야근을 하다 늦은 저녁 식사를 한 뒤 또 챙겨 먹었다.


약 기운에 정신이 설핏 몽롱한 것도 같고 부른 배를 꺼뜨리기 위해 굳이 따릉이를 타고 귀가해서인지 몸살기가 조금 있는 듯도 해서 오늘도 일기를 쉬어야 하나, 내적 핑계를 대면서 침대에 누웠다. 무심코 휴대전화의 사진첩을 열었는데 작년 오늘의 기록이 자동재생되었다. 그 순간 그곳에서 나는 오로라를 보고 있었다. 환갑을 맞이했던 신현욱 씨 그리고 그보다 한 살 많은 연상의 여인 김혜자 씨와 함께.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도 봤는데 좀 아프다고 이깟 일기 못 쓰겠나, 하는 그런 마음은 아니었고 그때를 떠올리니 그냥 오늘을 지나치기에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경을 딛고 여행의 마지막 날에 기적적으로 오로라를 영접하고야 말았던 10박 11일의 대장정이 딱 365일 전이니까. 그땐 한창 시시알콜의 디지털 매거진 ‘(酒)간 시시알콜’도 만들던 때라, 오로라와 마주한 감격을 글로 써서 구독자들에게 발송하기도 했더랬다. 제목이 ‘고래는 녹(綠)터널‘이었지, 아마.


에메랄드빛 야행성 고래는 모든 면에서 내 예상을 뛰어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상보다 거대했고 예상보다 빨리 그리고 자주 움직였고 예상보다 오래도록 지속되었고, 예상보다 아름다웠다. 우리 셋을 포함 현장의 모든 이가 탄성과 환호를 주체할 수 없는 듯 일제히 돌고래 소리를 뿜어댔다. 기념사진도 잊지 않았지. 몇 번을 돌아봐도 대단한 밤이었다.


모두가 잠든 그날 새벽에 혼자 한 시간 정도 오로라를 마주했던 것도 생생하다. 저 멀리 있던 광선이 마치 뱀이 이동하듯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정수리 바로 위로 흘러갔다. 갑자기 그 속도에 맞춰 달려보고 싶어져서 약 500미터를 질주했었다. 저만치 멀어지는 고래의 후미(後尾)를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던가 어쨌던가. 후미, 빠른 거.


뱃사람들은 배가 나아가는 방향이 아니라 배가 지나쳐온 뒤를 보면서 행로를 가늠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일기를 쓰며 잠시 뱃사람이 된 것일 테다. 가까운 과거를 항해하는 와중에 일 년 전 같은 배를 탔던 두 사람은 거실에 나란히 앉아 <가요무대>를 시청하고 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흥겨운 선원의 노래로 들리는 것을 보니, 지금 내가 적잖이 감흥에 젖은 모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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