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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Oct 04. 2019

#21. 매운맛을 보여주리

2019.10.02.

민방위 2년 차다. 올 6월부로 용산 구민이 된 관계로 금년도 훈련은 용산꿈나무종합타운에서 받았다. 안내받은 사항에 따르면 훈련은 서류상 주소지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착오 없으시길 바란다. 각설하고 이젠 예비군도 아니어서 전시에 전투병력으로 분류되지 않는 아저씨들이 꿈나무들을 위한 공간으로 소집하다니 재밌네, 하며 강당으로 입장했다.


예비군이 끝나서 좋은 점 중 하나는 복무 중인 현역병들에게 반말을 찍찍 내뱉으며 무례하게 구는 진상들을 안 봐도 된다는 것이다. 요새는 훈련 시스템이 바뀌어서 그나마 좀 덜하다고는 하는데 내 1년 차 때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평소엔 무골호인이던 선배가 돌변하는데 참, 그에 대한 애정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인간에게 큰 실망을 할뻔했던 기억이다.


아무튼 민방위 훈련은 약 네 시간에 걸쳐 이어졌다. 퇴역 군인 선생님이 동북아의 정세를 분석하며 한국이 얼마나 큰 위기에 처해있는지를 역설하던 소양교육 시간에는 좀 졸았고, 응급처치와 화재안전 교육은 나름 경청했다. 죽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위기상황에서 구하고 싶은 존재가 많기 때문이고 그보단 그냥 고개를 의자에 젖힌 자세가 편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수업 전 쉬는 시간엔 혈압을 재고 피를 뽑고 인바디 측정을 했다. 다행히 근육량이나 체지방량 등 대부분의 지표가 건강하다고 볼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었다. 신체발달점수는 80점으로 나왔는데 이는 ‘강함’ 수준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자타 공인 전투력 제로로 평가받는 내가 신체적으로는 강한 축에 드는 사람이었다니, 오늘의 발견이었다.


나보다 몇 곱절은 강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이역만리 파리에서 박사 과정을 이수하고 있는 시시알콜의 세 번째 청취자 게스트 김김님이다. 카페에서 처음 뵙고 작업실로 함께 이동했는데 첫인상이 엄청나게 강렬했다. 뭐랄까, 만화 <신 암행어사>에 숨겨진 그리고 극 전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연을 보유한 자객으로 등장하면 찰떡일 비주얼에 목소리마저 전설적인 명배우 윤석화 님의 그것과 흡사했다.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면서는, 짧은 동안이었지만 ‘이 사람 정말 강하다’는 확신 비슷한 것을 갖게 됐다. 대단히 많은 것들을 홀로 견디고 감내하고 극복해왔겠구나. 이 사람을 반으로 가르면 그 중심에 매우 단단한 나무 하나가 우뚝 버티고 있겠구나. 그 나무의 이름은 꿈나무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싸우면 질 것 같았다는 이야기. 이렇게 또 부전패를 적립했다.


파리의 우울과 아름다움을 생활로 향유하는 그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한국식 마라. 마라는 저릴 ‘마(麻)’에 매울 ‘랄(辣)’가 조합된 단어다. 저릿저릿할 정도로 매운맛을 보여줄 테니, 내한하면 연락하시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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