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와 불안에 내포된 속도의 특성
지난 화에 이어 화의 느낌 자체에 내포된 의미에 대해 다룹니다. 마지막에 링크로 첨부해 놓은 4화와 23화를 함께 보시면 아마도 의미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이로써 화의 발생 원리는 명백해졌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화는 마치 벽에다 대고 의지를 짓이길 때 일어나는 고통과도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가 이 양자 사이에서 ‘생성’된다는 말은 아니다. 화는 기존의 의지가 변형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방해 요인과 마찰을 빚는 동안 기존 의지의 일부, 아마도 그 표층부가 성질 변화를 일으켜 화의 형태로 변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마찰은 대체 어떤 식으로 의지에 변형을 가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의지를 가속시킬 것이다. 일정한 방향으로 밀려드는 힘은 저항을 받으면 받을수록 흐름이 거세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화가 났을 때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도 다 이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추정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점을 분명히 하려면 화가 표출되어 나오는 형식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잘 알다시피, 화의 표현적 측면이라 할 수 있는 공격성은 빠른 속도가 특징이다. 육체적 공격 행위의 대부분이 이 속도라는 요인에 의존하며 의미에 비중을 두는 욕설조차도 격한 음조의 도움 없이는 그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게다가 공격성의 상징인 맹수의 이빨, 칼과 총탄 따위는 그 작용 과정뿐만 아니라 형상 자체에도 속도라는 요인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속도라는 것을 굳힐 수 있다면 이처럼 날카로운 형상을 취할 것이다.
또한 평범한 생물이나 사물이라 하더라도 급속도로 움직이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위협적이거나 공격적이라는 인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결국 이 과속이란 요인 하나만으로 거의 모든 공격성을 포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를 구성하는 의지에 같은 속성을 부여한다 해도 문제 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결과에 속하는 것은 반드시 원인 속에도 내재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화가 의지의 과속 운동 그 자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현실에 부딪혀 부서지는 의지를 실제로 확대해 볼 수 있다면, 아마도 이 같은 과속 운동을 발견해 내게 될 것이다. 화 특유의 통증 자체에 이미 속도라는 요인이 들어 있는 것이다. 어쩌면 화의 뜨거운 느낌조차 결국 속도의 이면에 지나지 않는지 모른다.
물론 이처럼 모든 것의 일면만을 보는 태도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서만큼은 이 관점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이 관점을 통해 은폐되는 사실보다 밝혀지는 사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관점에서 현실을 바라보면, 화를 품고 사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속도에 내몰리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짐작해 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화는 불안과 대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앞서 불안을 묘사할 때도 여기서 동원한 것과 비슷한 비유에 의존했다. 즉, 불안도 의지 간의 연쇄적 충돌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심리적 통증이었다.* 따라서 불안이란 감정도 자체 내에 속도란 요인을 품고 있어야 할 것이다. 불안도 결국 의지의 과속 운동이긴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마도 이 점은 불안이 표출되어 나오는 모습들만 떠올려보아도 즉시 명백해질 것이다.
*(불안에 대한 내용은 아래 글을 참조해 주세요.)
하지만 불안의 경우에는 화의 경우와는 달리 의지가 당사자 자신을 향해 밀치고 들어왔다. 공격적으로 치고 들어온 그 의지도 당사자의 의지이긴 마찬가지였지만, 어쨌든 순간적으로나마 조화를 잃고 기존 의지와 충돌하며 마찰을 일으켰다. 당사자가 공격을 받는 피해자의 역할까지 함께 떠맡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로부터 화와 불안이 주체와의 관계에서 방향성만 반대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도 좋을 것이다. 단순히 하나를 뒤집는 것만으로 다른 하나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면 이 점이 훨씬 더 분명해질 것이다. 잘 알다시피, 공포를 일으키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눈앞에 공격성을 들이대는 것이다. 실제적이든 상상적이든 눈앞에 공격적 언행이나 상징물 따위를 들이밀기만 하면, 우리는 즉시 증폭된 형태의 불안, 즉 공포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공격성이란 것은 사실 화의 구현체에 지나지 않는다. 상징적 대상을 향해 육화 되어 들어간 화, 그것이 바로 공격성이다.
따라서 이 강렬한 불안을 뒤집힌 화 그 자체라고 말해도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단순한 방향성 전환만으로 성질 자체가 완전히 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관계는 얼마든지 다시 역전될 수 있다. 즉, 회피 행동을 일으키던 강렬한 불안이 반대로 뒤집힌다면, 그것은 화로 돌변해 공격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
궁지에 몰린 동물의 공격 행동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아무리 온순한 동물이라도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는 공격을 가해 오는 것이 보통인데,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분명 그전에 이미 내면에서 회피 의지가 반대로 뒤집혔기 때문일 것이다.
#화 #불안 #메커니즘 #투쟁 도피 반응
공간상으로 전개되는 과속 운동을 한 점으로 응축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점에서는 아마도 뜨거운 느낌이 느껴질 것입니다.
반대로 뜨거운 느낌을 공간상으로 잡아 늘려볼 수도 있겠지요. 불을 동력 삼아 달리는 증기 기관차나 요란하게 끓어오르는 물주전자의 경우 처럼.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빨리 빨리를 외치며 속도에 집착하는 것도 가슴속에 화나 불안을 품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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