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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Nov 04. 2021

고양이는 울지 않는다

일간 <저 여기 있어요> 수록글


2013년 여름, 오빠가 군부대에서 어미 잃은 길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나는 이제 집을 나와 산지 몇 년이 지나 더 이상 고양이와 같이 산다고 하기 어렵지만 아무튼 고양이를 키운다고 말하고 다닌다. 그리고 이건 고양이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이야기다.


삶에 고양이를 들인 뒤로 고양이가 잘 보인다. 유난히 내 곁을 맴도는 것 같다고 느끼기도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관심의 크기는 일상에서 대상이 나타나는 빈도를 늘린다. 늘 그 자리에 그만큼 있었을 텐데도. 부모님 집 앞마당에는 고양이가 많다. 밥을 주면 까치와 고양이가 경쟁적으로 밥을 먹는다. 부모님이 일 년 동안 제주 살이를 하셨던 단독주택에도 밥을 먹으러 찾아오는 노랑이가 있었다. 지금 내가 사는 성북동 언덕 집 골목에도 고양이가 많다.


연휴를 맞아 본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새벽 다섯 시에 송이는 어김없이 운다. 밥 먹을 시간이기 때문이다. 크고 애처로운 목소리다. 누군가 깨어서 수발을 들 때까지 송이는 울 것이고, 밤잠 예민한 내가 가장 먼저 일어나 밥을 줄 것이다. 송이가 밥을 먹는 동안 떠나지 않고 옆에서 지켜본다. 먼저 일어나면 송이는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송이는 말이 많다. 우리가 송이에게 말을 많이 걸어서 그렇고, 우리가 자율배식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 밥을 먹고 싶을 때마다 달라고 해야 하니 송이는 더욱더 말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사냥의 습성은 잃고 그저 울뿐이다. 송이는 의사표현을 대부분 말로 하는 편이다. 고양이는 새끼 때, 발정기 때 외에는 소리를 내는 경우가 잘 없다고 한다. 고양이들끼리는 몸짓으로 의사소통하기 때문에 사람하고 대화하기 위해 소리를 내는 거라고. 그것도 사람 말을 배워서 비슷하게 흉내 내는 거라고 하니, 사실 우리가 고양이나 강아지한테 뭐라고 하는 것도 그들에겐 겨우 인간이 울고 짖는 것으로 밖에 안 들릴 것이다.


사람과 살지 않는 고양이는 울지 않는다. 제주도 집에 찾아오던 노랑이는 밥 달라고 우리를 부르지 않았다. 창문 앞에서 인간이 자신을 발견할 때까지 기다린다. 창문이 열려있지 않다면 밥 주는 자리에서 하염없이 기다린다. 엄마가 노랑이에게 밥을 너무 조금 주길래 애가 배 부르겠냐고 묻자, 엄마는 책임질 것 아니면 책임질 수 없는 만큼만 줘야 한다고 했다. 엄마는 사료 몇 알 가지고 노랑이랑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한 밀고 당기기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떠날 텐데 노랑이가 우리에게 적응하면 안 된다면서. 엄마의 뜻대로 우리는 노랑이랑 가까워지지 않았다. 노랑이는 매일 같은 시간에 꼬박꼬박 오다가도 한 며칠 사라졌고, 다시 나타나길 반복했다. 우리가 밥을 주러 나가면 눈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한 번 달아났다가 돌아왔다. 계속 밥을 줘도 노랑이는 끝까지 번거로운 거리두기를 멈추지 않았다. 노랑이는 우리에게 영영 말을 걸지 않았고, 한 번도 가까이 오지 않았다.


밥을 준다는 것이 고양이를 길들여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고양이와 관계 맺으려는 마음은 욕심이다. 고양이는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 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니까. 고양이에게 잘해주고 싶다면 밥을 주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 맞다. 나중에 빈그릇을 찾는 것이 맞다. 서로 무언가를 주고받게 될 것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은 욕심이다. 어떤 행동의 반복이 관계를 진전시킨다고 믿고 싶은 것은 마음을 얻고 싶은 사람의 논리일 뿐이다. 고양이는 사람과 가까워질수록 야생을 잃고, 자립 능력이 낮아질 것이다. 친절한 사람에게 인간의 언어를 배우면, 불친절한 사람에게도 마음을 열 것이다.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서서히 잊을 것이다.


성북동 집에 찾아오는 고양이도 울지 않는다. 그저 창밖에서 내가 자신을 발견할 때까지, 돌아볼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 돌아간 적도 있을 것이다. 내가 고양이를 보지 못한 날이 많았으니까. 왜 고양이에게 밥을 주느냐면, 귀엽기 때문이다. 너무너무 귀엽고 또, 내가 그들을 연민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집에 사는 송이에게 미안하고, 골목에서 겨우겨우 밥을 먹고 물을 마시는 고양이가 안타깝다. 집고양이가 슬프고 길고양이가 안타까운 마음 가운데서 갈팡질팡 할 뿐이지만 책임질 수 없는 마음을 자꾸만 쏟고 싶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겨우 몸이 닿지 않도록, 내가 자꾸 암묵적으로 관계를 강요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을 뿐이다.


밖에서 만나는 고양이들은 말을 안 한다. 고양이를 챙겨주는 인간, 캣맘 하고 친해졌거나 유기묘이거나 어릴 때부터 사람이 익숙한 고양이가 아니라면 사람에게 소리 내어 표현하지 않는다. 나는 길고양이가 계속 말을 하지 않길 바란다. 말을 익히지 않고, 사람의 말을 흉내 내지 않고, 마음을 주지 않고, 언젠가 찾아올 수 없게 될 이에게 상처 받지 않길 바란다. 그 언어를 합의하지 않은 인간에게 고통받지 않길 바라고, 언제 올지 모르는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사라진 익숙한 일상을 오래 기억하지 않길 바란다.


이건 고양이가 아니라 내 이야기다. 나는 내가 책임질 수 없는 마음을 함부로 쓰는 사람이 아니길 바란다. 누군가 나를 간절하게 여길 만큼 나를 배우지 않길 바라고, 나 또한 작은 호의에 마음을 크게 열지는 않기를 바란다. 자꾸만 타인에게 기울어지는 마음과 어쩔 줄 모르는 감정을 단단히 붙잡고 나를 견디고 싶다. 다른 사람의 세계를 너무 일찍 익히지 않고, 그를 너무 닮지 않고, 손 쓸 수 없을 만큼 멀리 마음을 주지 않고, 마지막으로 지난 일상에 오래 머무르지 않기를 바란다. 고양이는 원래 울지 않는다.





이 글은 웜그레이앤블루 일간 <저 여기 있어요>의 연재 원고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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