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책자 Jul 29. 2022

우리는 화해할 수 있을까

영화 <경아의 딸> 2022

 

강릉 신영 독립 극장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세 편을 보는 동안 상영관에는 다섯 명 이상 들어온 적 없고, 경아의 딸은 혼자 봤다. 나에게 <경아의 딸>은 한 편의 공포영화와도 같아서 처음부터 갈등을 내리꽂는 스토리를 어느 정도 파악한 뒤에는 영화관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게 영화의 첫 인상이었다. 하지만 혼자뿐인 상영관에 밖에는 관객보다 많은 직원이 있고, 지금 여기서 나간다고 할 것도 마땅치 않았으므로 나는 버텨보기로 한다. 
 

이 영화의 제목은 이상하다. 경아와 딸 아닌 <경아의 딸>은 마치 두 사람을 하나의 인물처럼 겹쳐보게 만든다. 서로를 서로에게서 분리해 낼 수 없게 한다. 이것은 불편한 동시에 효과적이다. 결국 지칭하는 것은 경아가 아니라 경아의 딸 연수인데 엄마와 딸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으리란 예감이 먹구름처럼 뭉게뭉게 마음 바닥에 짙게 깔린다. 연수라는 이름은 자꾸 잊혀진다. 어떤 엄마의 세계에서 딸의 이름은 자주 엄마의 그것으로 투영되어 잊혀지는 지. 


경아와 딸에게 닥친 문제는 롤러코스터처럼 불길한 소리를 내며 긴장감을 키우는 방식 대신 일단 우리를 정상에 데려다두고 등을 절벽 아래로 떠민다. 엄마의 태도, 남자친구의 불안한 눈빛이 모든 사고를 예감하게 한다. 연수는 이별에 앙심을 품은 전남친의 성관계 동영상 유포로 삶이 한 순간에 무너진다. 그리고 가장 믿었던 사람, 엄마 경아에게 경멸어린 시선을 받고는 모든 것으로부터 숨어버린다.


출처: 네이버 영화

 

우리는 가끔 시선이 향할 곳을 잘못 판단한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이 아니라, 손가락을 펼쳐든 사람을 바라본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고통을 마치 전시된 상품인 것처럼, 가벼운 가십거리처럼 보고 즐긴다. 추행을 당할 때는 "어머 왜 이러세요!"라고 하면 사람들이 ‘뭐야 무슨 일이야.’하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고, "변태야!"라고 하면 ‘뭐야, 누가 변태야.’라며 변태를 바라보게 되니 피해자의 목소리를 내지 말고 가해자를 정확히 겨냥하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문제를 ‘흥미’로 파악하는 인간의 습성이 나를 울컥하게 만든다. 우리는 가끔 실수를 한다. 문제를 만든 놈이 나쁜 놈인데, 피해자에게 그러게 왜 그러고 다녔냐고 한다. 가해자가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아무 일 없이 살 수 있을 텐데. 내가 물건을 두고 잠시 자리를 비웠고, 물건이 사라졌다면, 괜히 물건을 주인 없이 둬서 훔치고 싶은 충동이 들게 한 물건 주인이 잘못한 것일까. 물건을 훔친 것이 잘못일까. 그것과 이것이 다르지 않다. 


출처: 네이버 영화


우리 사회는 자주 비난의 화살을 상처 받은 사람에게 돌린다. 이해할 수 없는 괴물(가해자) 대신 자기 삶의 범위에 속한 인간의 태도를 교정하는 것이 나와 피해자의 삶에 거리를 둘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존재여야, 피해자가 틀렸어야 내가 안전해지기 때문이다. 경아는 딸을 힐난하는 방식으로 자기 세계의 상식을 지키고 자신을 ‘틀린 것’과 구분 짓는다. 그녀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깎아내려 자신을 보호하려 한 잘못으로 연수를 잃는다. 약자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크게 느껴진다. 깨진 유리병을 고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하지만 진짜로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은 외부 세계와 물질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다. 다시 얻을 수 없는 것, 대체할 것이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것, 마음.

-


영화를 보며 가장 내 눈을 빠르게 사로잡았던 장면은 온라인 불법 유포 영상을 지워주는 업체를 사용하기 위해 목돈을 쓴 연수가 자취방을 더 외진 곳의 작은 고시원으로 옮기고 침대 위에 누워서 작은 휴대폰 속 영상을 보며 웃고 있는 장면이다. 물론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발견된 그녀의 모습은 외롭고 쓸쓸하다. 사회 안전망 바깥에 내몰린 그녀를 구할 수 있는 것이 돈밖에 없다는 사실에 화면 밖의 나도 지쳐간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구석으로 내몰린 사람들은 외부 활동을 점점 하지 않게 되고, 작은 휴대폰 화면에 의지해 시간을 보내고 디지털 세계에 갇히게 된다는 분석적인 이야기를 차치하더라도 방에 갇혀 사는 그녀의 삶이 기쁠리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 연수가 웃고 있는 장면을 영화가 보여준다는 것에 지친 마음을 달랜다. 오랜만에 등장한 얼굴이 아직 웃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역경에 굴하지 않고 웃음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느끼게 한다.


불행과 행복은 양자택일의 반의어가 아니다. 행복할 때에 불행이란 존재하지 않고 불행이 시작하는 순간 행복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언어는 너무 자주 이분법의 형태를 취한다. 반대 의미를 지닌 단어들이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인간은 불행이 자신의 삶을 잠식할 때도 웃을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불행 한 장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혼자만의 방에서 엉엉 울다가도 나와서 밥을 먹으며 웃고, 다시 들어가서 울게 되더라도 우연히 마주한 순간들에 웃음 지을 수 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운 연수가 동굴에서 천천히 사람들과 교류를 넓히며 삶을 되찾는 과정이 느려서, 잘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하는 동시에 다행을 느낀다. 회복 없이 회복 해야만 해서, 사회로 나가야한다는 강박에 의해 사람들의 손에 이끌렸다면 연수가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엄마 탓 아니야. 내 탓도 아니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달래서, 스스로를 닦달해서 채 낫지 못한 상처를 안고 다시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많이 본다. 나조차도 그런 삶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상처입은 마음을 안고도 ‘잘’ 살아야 해서, 타인의 기준에 미치기 위해서 피 흘리며  걸었던 날들을 떠올린다. 


깨진 유리병을 붙이려는 경아의 분투와는 별개로 영화는 경아에게 친절하지 않다. 경아가 연수의 삶을 옥죄고 흔든 폭력적인 방식과 실수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덮어둘 수 없는 것이라고, 더이상 연민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용서를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경아와 연수의 거리를 통해 보여준다. 두 사람은 화해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 안에 남은 상처를 영영 인식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상처를 통해 깨달은 것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화해할 수 있을까

경아의 딸, 2022, 김정은 감독

김정영, 하윤경, 김우겸

매거진의 이전글 애프터 양: 기억의 숲에서 우리가 찾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