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함을 버리고 싶진 않아
친구들과 수지에니어그램 워크숍을 했다. 머리형, 가슴형, 장형으로 구분한다는 용어 자체가 썩 매력적으로 들리지 않는 툴이었지만 좋아하는 친구들이 한번 해보자고 해서 흔쾌히 참여했다. 이런 워크숍 비용이 제법 비쌀텐데 실습 차원에서 무료로 해주셨다. 원래 상담을 오래하시던 분이니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진 않겠지. 10여 년 전에 어떤 모임에서 한번 그룹상담을 받았는데 어떤 유형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MBTI 검사 결과는 ENFP 랑 INFP 랑 왔다갔다 한다. 타로카드를 배울 때나 사주 공부하는 친구 말을 들어보면 생년월일시에 따른 원형과 기운, 별자리에 따른 성격이 있던데 그에 대한 나의 입장은 명확하지 않다. 엄청 신봉하면서 언제나 의존하는 건 아니지만, 친구가 사주 봐주면 좋아하고 타로카드로 내 마음 읽는 것도 좋아한다.
에니어그램도 사람을 유형별로 구분해놓고, 내가 어디에 해당하는 사람인지 찾아내는 과정을 거친다. 각 유형의 특징이라고 설명되는 부분에서 이것저것 다 해당하는 거 같아 끝까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어려웠다.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서 나는 이러지는 않는 것 같다며 하나씩 제거하다가 3번 가슴유형을 하기로 했다.
다재다능하고 순발력 있고 문제 해결에 능한 사람. 효율을 따지며 성공과 성취에 대한 욕망이 큰 사람. 어려움에 처한 상황이나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희망의 빛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너무 밝은 곳에서 무조건적인 큰 성공을 욕망하면 그 빛의 가치를 알아챌 수 없다고. 사실 좀 무슨 말을 하는지 딱 와닿지는 않았다. 3번 유형의 사람은 바로 옆의 유형인 2번과 4번의 특징을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을 할 때 사용한다. 2번은 남을 돕고, 사랑하고, 남의 의사나 필요와 상관없이 먼저 몸이 달려가 행동하는 사람이다. 내 본질이 이게 아닐까 마지막까지 헷갈렸다. 나는 남에게 감동을 주는 일이 좋고, 감동받은 상대가 나에게 그 사실을 확인시켜줄 때 정말 행복하니까. 베풀고 사랑하고 남을 기쁘게 하는 다정한 사람이고 싶다. 그런데 전형적인 2번 유형의 사람들처럼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이타적으로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라 이거지. 4번은 고유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거나 찾아내는 창의적인 사람, 독창적이고 남과 다른 삶을 원하는 예술가형이다.
3번이 포함된 가슴형(심장형) 유형들은 불안에 취약하다. 어떤 문제를 직면했을 때 본능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달려나가는 장형,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법을 찾는 머리형과 달리 감정으로 느끼고 공감한단다. 가슴이 뛰고 불안을 느낀다고. 장형은 분노로 움직이고 머리형은 두려움과 늘 함께다.
내가 어떤 본질의 사람인지 알아채기 위해서 하는 활동으로는, 9가지 유형이 할 법한 행동이나 생각이 적힌 카드 중에서 나를 나타내는 카드를 모두 골라 붙이는 거다. 나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카드를 골랐는데 모든 유형이 거의 골고루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채기가 어려웠다.
일단은 오늘 한 프로그램의 내용과 결과를 믿자고, 받아들이자고 작정해도 나에게는 너무나 다양한 양상의 내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본질이든 사회생활을 위해 필요해서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든.
옳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나를 절대 굽힐 수 없는 1번의 인간, 세상을 탐구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위해 연구하는 5번의 인간, 성실하고 신중하게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6번의 인간, 재미와 행복, 멋을 추구하고 즐겁고 유쾌한 관계를 위해 활발하게 작동하는 7번의 인간, 자기 신념을 실천하는 강한 리더형 8번의 인간, 평화와 조화를 추구하며 타인을 위로하는 9번의 인간. 그리고 각각의 유형의 특징에서 부정적 에너지로 나타날 수 있는 감각과 행동들까지도 가득하다.
동그란 카드는 긍정의 기운, 네모난 카드는 부정의 기운이라고 거칠게 구분할 수 있는데 주황색 3번 본질카드 만큼이나 다른 카드도 아주 복작복작하다. 나는 너무 많은 생각과, 너무 많은 결심과, 너무 많은 행동과, 너무 많은 실망과, 너무 많은 고통을 품고 있다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나로 존재하고 행동할 때 편안하고 장점을 발휘하기 쉬운데 너무 많은 것들을 다 잘하고 싶고 욕심내고 있으니 복잡하고 가득차고 버겁고 지친다. 그러다가 다 놓아버리고 싶어져서 에라 모르겠다. 다 귀찮다. 될대로 되라, 하는 심정이 된다. 과거에는 도망치듯 사라진 경험도 있다. 요즘은 매일 일기 쓰면서 내 마음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억지로라도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려고 하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게으르고 무력해지기 전에, 천천히 가게하고 성과없는 시간을 갖게 한다. 실은 그래서 좀 심심하다.
활력 넘치게 뭔가 막 일어나는 기분이어야 하는데 가득한 풍선이 터지지 않게 조심조심 돌려가며 바람을 빼고 있는 느낌이랄까. 과거의 나는 빵 터트리고 산산조각이 난 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서 풍선에 바람을 서둘러 다시 채우는 사람이었다.
오늘의 활동중에서 가장 좋았던 시간은, 그렇게 온통 가득찬 내 카드들을 좀 떼어낼 때였다. 이렇게 해야한다고,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신념의 실천, 올바른 가치관, 탐구, 정의를 위한 강박 같은 것들을 다 떼어냈다. 본질만 남기고. 본질이 상호작용하는 통합, 비통합의 에너지도 있는데, 이건 좀 복잡하니까 넘어가고.
조화롭고 평화로운 생명의 세계를 지향하지만 자칫하면 의무에 대한 강박과 그로 인해 세상만사 다 귀찮은 무기력이 올 수 있다는 걸 기억하면 된다. 카드를 떼는 순간 조금 울컥했다. 이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믿고 있는 가치들을 버리겠다는 건 아니지만 동시에 그것들이 강박처럼 나를 힘들게 했던 것도 사실인 거 같아서. 내 마음이 편안한 방식으로, 진짜로 원하는 것을 해나가기 위해, 나의 본질이 잘 발현되는 쪽으로, 더 쉽고 잘 해낼 수 있기를. 그게 뭐가 되든. 좀 헐렁해진 카드들을 보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래도 유쾌함은 끝까지 놓고 싶지 않아서 노랑 카드 두 장은 살려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