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에 한 일과 하지 않은 일
토요일에 쉬지 못하면 일요일은 적극적으로 쉬어줘야 한다. 9시쯤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왔고 냉장고에서 오이 한 개를 집어 들고 다시 이불로 와 누웠다. 요즘은 오이에 빠졌다. 어찌나 달고 시원한지 오이가 제철이라 그런지, 오이를 사랑하게 되어서 그런지 원래 좋아하던 당근한테 미안할 지경이다. 그렇게 누워서 오이 한 개를 다 먹고 나니 일어날 기운이 생겼다. 오이를 들고 올 때 꼬다리 부분을 잘라내고 왔기 때문에 끝까지 다 먹을 수 있다. 이런 완결성이 묘하게 쾌감을 준다. 이제 진짜 기상이다. 냉장고에서 당근을 꺼내고 역시 꼬다리를 잘라내고 소파로 가서 얼마 전 산 책을 읽었다.
출근하기 너무 싫지만 돈은 벌었으면 좋겠고, 회사가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사라지니 어떻게 일해야 할지 너무 고민이라 역시 또 일에 대한 책을 주문했다. 회사 다니면서 사이드 프로젝트로 뭐라도 하면 기운이 좀 날까 싶어서 <딴짓 좀 하겠습니다>를 읽었는데, 역시 회사를 그만 둬야 될 것 같다. 이제 정말 ‘내 일’을 해야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이 부글부글한 마음이 어떻게든 정리가 될텐데. 그래서 혹시 도움이 될까하고 <내 일을 쓰는 여자>도 주문했는데 서문만 보고 다시 덮었다. 머리아파. 일요일까지 고민하고 공부하고 싶지 않다.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는 어쨌뜬 계속 쓰고 싶은 사람으로서 여성 작가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주문했다. 에세이는 후루룩 쉽게 읽히니까 금방 읽고나서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12시쯤 다시 일어나서 순두부찌개 끓여먹고 샤워하고 엊그제 수리 맡긴 차를 찾아왔다. 역시 순두부찌개는 끓이기도 쉽고 맛있다. 순두부 1개가 6백원이니 기본 양념인 참기름, 고춧가루, 마늘만 있으면 라면 보다도 싸다. 떡국떡 한주먹을 넣고 끓이니 든든한 한 끼가 되었다.
차를 찾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코로나19로 인해 긴급생활지원금을 여러 단위에서 주는데, 완주군도 전 군민에게 5만원씩 상품권으로 지급한다. 동네주민들이 모인 인터넷 까페에서는 인근 도시인 군산이나 익산보다 조금 준다고 불평도 많았다. 뉴스를 보니 형편이 괜찮은 사람들은 다시 기부를 하기도 한다던데 나는 장보러 가서 평소에 가격표 보고 들었다놨다 하던 것들을 잔뜩 샀다. 이번주는 수요일까지 3일만 출근하면 되니까 도시락에 대한 걱정이 줄었다.
빨래와 청소는 하지 않을 작정이다. 하기 싫으니까! 주말에 집안일도 안 하고 참 게으르구나 라고 말할 것 같은 마음속 나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선수 친 기분이다. 통쾌하다. 눈 아프게 휴대폰 들여다보는 대신 책을 읽으려고 했는데 집중이 잘 안되어서 4월의 가계부 정리를 했다. 연말에 계약기간 끝나서 회사를 그만두게 될테니까 슬슬 퇴사 후를 더 적극적으로 고민해야한다. 연말까지 얼마를 더 저축할 수 있는지, 수입이 없을 때 한 달 생활비는 얼마로 할 건지, 불안하지 않게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어느 정도일지, 만약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면 얼마쯤 감당할 수 있는지 등등을 계산해보려고 했지만 너무 어려워서 일단 내가 가진 총 자산만 정리해봤다. 엄청 부지런하게 절약하고 저축하고 살았네.
주식이니 부동산이니 전혀 모르고 관심이 없는데,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나 싶은 불안감이 또 몰려와서 (어제 에니어그램 결과처럼 역시 나를 채우는 건 불안인 건가) <적정소비생활> 박미정 님의 교훈을 떠올려봤다. 잘 모르겠으면 일단 적금이나 예금으로 잘 모아라, 보험도 젊었을 때 목돈 없는 사람이 만약을 위해 드는 것이지 2~3천 병원비로 낼 수 있을만큼만 자산이 생기면 크게 필요없다. 그치, 큰 벌이 없이 살아오면서 돈 사고 안 치고 이만큼 성실하게 잘 살아온 나님에게 치어스.
허벅지 안쪽이 헤진 청바지를 버릴까 그냥 입을까 하다가 첫을 덧대어 꿰매봤다. 버리더라도 몇 번은 더 입을 수 있을 거 같다. 이런 걸 하고 있으면 나의 원 가족은 ‘니가 얼마나 돈이 없으면 요즘 세상에 그렇게 옷을 꿰매 입냐?’ ‘내가 사줄까’ 이런 태도를 보인다. 돈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옷 한 벌을 사지 못할 정도로 돈이 없는 건 아닌데, 나는 그냥 돈을 막 쓰지 않을 뿐이다. 차라리 독립적인 생활인이 못 되어서 옷을 사는 게 너무 어려운 일이어서 피하고 싶은 쪽에 가깝다. 그래서 겸사겸사 어떻게든 버틸 때까지 버티는 거겠지. 이렇게 또 조금 더 버티면 금방 여름이 오는데, 여름에 입을 청바지는 또 많기 때문에 청바지 쇼핑은 내년으로 미뤄질 거 같기는 하다. 바느질을 해볼까 하는 생각은 청바지가 헤져서 살이 보일랑말랑 할 때부터 했는데 역시나 귀찮고 피곤해서 계속 미뤄왔다. 그런데 오늘 청소도 안하고 빨래도 안하고 돈 계산을 하고 있다 보니 꿰맬 힘이 생겼다. 옷도 잘 버리지 않는 편이라 진짜진짜 안 입는 옷만 재활용 분리수거함에 내놓고 헌옷으로 뭐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모아둔다. 고양이가 할퀴어 찢어놓은 이불을 꿰매기도 하고 쿠션에 옷을 입히기도 하고 아주 아름답지는 않아도 다양하게 생활에 필요한 부분을 직접 만들어쓰는데 이용한다. 그 꾸러미 안에서 천조각을 찾아내서 청바지 안쪽에 덧대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촘촘하게 꼬맸다. 하하하. 바느질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엄청 삐뚤빼뚤하지만 한 시간 내내 집중해서 바느질을 하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제법 괜찮은 상태로 월요일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