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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dac May 06. 2020

이거 꼭 해야 되나?

영혼과 진심이 게으름을 피우는 때, 비워둘 필요가 있는 시간

무심하고 무던하게 다닐 수 있는 만큼만 회사를 다닐 것이다. 나도 모르게 열심히 하고선 억울해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껏 열심히 하고 보람을 느끼고 동료들과 함께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곳이라면, 지금 이 순간에 마음 다치지 않게 시간이 흘러가길 버티고 기다릴 뿐. 내가 아는 방식으로 빨리 처리하고, 많은 일을 하는 걸 일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틀린 생각은 아니겠지만 언제 어디서나 들어맞는 방식도 아닐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상사들과도 관계가 틀어졌으니 큰 문제 생기지 않게 그때그때 방어하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사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걸 조금만 이렇게 하면 더 좋을 거 같은데, 그대로 두기엔 뭔가 좀 이상한데 싶은 생각이 들 때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거나 말을 꺼내고 만다. 어제 만난 친구는 그럴 때 ‘이걸 절대로 열심히 하지 않겠어’라고 결심하고 실행하기는 너무 어려운 일이니 생각의 틀 자체를 바꿔서 ‘이걸 꼭 해야돼?’라고 질문해보라고 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 내가 맡은 부분을 내 마음에 흡족한 상태로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마음 때문에 괴로웠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그렇게 혼자 갖은 애를 써서 뭔가를 해내고 나면 남 좋은 일만 시키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억울했다. 뭔지 모르지만 다른 그 무엇. 아는 사람만 알아채는 미묘한 완성도의 차이. 그걸 누가 몰라줘서 억울한 게 아니었다. 수고했다, 애썼다, 너무 좋았다, 너무 잘했다 이런 인사들이 하나도 내 맘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 곳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써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무언가를 위해서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된다. 근데 억울한 마음이 든다면 그만 해야지. 그래서 그만 하려고.

대충 합시다. 돈 받은 만큼만 합시다. 하고 싶은 만큼만 합시다. 이렇게 다짐을 해놓고선 또 눈에 보이는 자잘한 일거리들을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하자고 말해버렸다. 얼른 정신 차리고 아까 그거 ‘꼭 그렇게 해야 될까?’라고 스스로에게 다시 질문하니 안 해도 될 거 같다고 얼른 옆자리 동료를 찾아가 고백했다. 앞으로 뭔가 일을 향해 달려나가려는 마음이 들 때, 한 템포 쉬면서 서로에게 물어보자고. ‘꼭 그렇게까지 해야 돼?’ 친구와 마주보며 둘이 그말을 입 밖으로 꺼내 주고 받으니 너무 웃겼다. ‘하하하! 하지맙시다!’

이 사실을 인지하는 게 마냥 슬프기만 하던 시절도 있었다. 나는 열심히 하고 싶고, 노력해서 더 좋은 것들을 찾아가고 싶은데 이건 순전히 남 탓이다. 그러니까 나는 당장 이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 실제로 그렇게 맨날 퇴사를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퇴사의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뭐랄까, 마지못해 버티고 있다기 보다는 때를 기다리는 느낌이다. 매순간 전력을 다해 살 수는 없으니까. 지금은 영혼과 진심이 게으름을 피우는 때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나처럼 목적지향적인 사람에게는 게으르다는 말이 나쁘게 들릴 수도 있으니, 여유를 주고 비워둘 필요가 있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잘하고 싶은 마음을 열심히 굴리는 시기가 있다면 여유를 두고 비워두는 시기도 있는 법이다. 월급 받는 거에 비해 수십배 일 많이 하던 시기도 있었고, 좀 노는 날도 있는 것처럼. 그리고 지금 내가 월급값 못하고 있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음. 어째 연휴를 보내고 마음이 좀 너그러워진 것도 같다. 일이 쌓여있으면 마음이 급해져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최대 속도로 처리하곤 했는데 쉬엄쉬엄 해도 된다. 전에는 일이 많으면 빨리빨리 다 끝내버리고 정리하고 나서 완결된 모습을 볼 때 느끼는 보람이 컸다. 일이 되어가는 모습이 재밌었으니까.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게 익숙하고 편안한 측면이 있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 시간동안 긴장하고 온 에너지를 다 쏟아붓고 나면 쾌감과 동시에 우울감이 밀려오는 것도 분명 있었을 거다. 꼼꼼히 확인해가면서 차근차근 해도 된다고 나한테 자꾸 말해주면서 전 같으면 이렇게 느리게 하지 않을 일들을 느긋하게 한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오늘 뭐했나 생각해보면 충분히 많이 했단 말이야. 내가 아무리 대충 천천히 한다고해도 남들보다 빠르지, 암. 잘 하고 있다. 계속 이렇게 무심히 무던하게 지내보리라. 모든 일 앞에서 두 번 세 번 물어봐야지. ‘이거 꼭 해야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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