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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dac May 22. 2020

안 해 본 일을 해내는 기쁨,  차근차근 해보지 뭐.

오늘의 행복 :  피순대, 여름 바지, 수박

3주째 금요일에는 외식을 한다. 어제 낮부터 점심 메뉴를 정했고, 시장으로 간 김에 여름 바지도 사기로 결심했다. 전에도 썼듯 나는 옷을 사본 적이 거의 없어서 긴장되었지만 쉽게 쉽게 사고 옷도 좋아하는 옆자리 동료가 함께 가니 왠지 든든하게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오늘 생리통이 심해서 그렇지 않아도 두렵고 떨리는 옷쇼핑을 잘 할 수 있을까, 욕심 부리지말고 점심만 먹고 오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두려움을 피하고 싶었던 무의식일까. 그냥 오늘도 사지 말자는.

남부시장 최고의 맛집 운암콩나물해장국을 가려다가 몸보신을 위해 급작스럽게 메뉴를 변경했다. 엄마손해장국의 피순대와 순대국밥으로. 지난번에 친구들 왔을때도 먹었지만 너무 맛있어. 오늘처럼 기운 없는 날은 담백한 콩나물국밥보다는 아무래도 피순대지. 식당으로 가는 길목에 옷가게가 아주 많았고 다행히도 제법 괜찮은 바지를 발견했다. 밥 먹고 나오는 길에 컨디션 봐서 들려봐요. 라고 쇼핑마스터가 말해주었다. 그리곤 피순대를 먹다보니 점점 하이텐션으로.... 그래서 에너지 가득 채운 상태로 옷가게 입성. 아무래도 처음에 본 바지가 제일 괜찮은 것 같고 입어보니 마스터님이 딱이라고 해주어서 큰 고민 없이 샀다. 여름 유니폼으로 돌려가며 입으려고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바지를 하나 더 골랐다. 혼자였다면 가격도 생각하고 디자인도 생각하고 살까 말까 엄청 고민하면서 입어보겠다는 말도 못했을텐데 마스터님이 옆에 계시니 든든한 건지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인지 (도대체 뭘) 척척 골라서 샀다. 잘 산 것 같다. 2만 5천원짜리 여름용 마바지 2벌을 샀다.

엊그제는 자동차에 워셔액 붓기를 성공하고 나니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더니만 오늘은 세상에 내가 바지를 샀어. 시장 옷가게에서!


안 해본 걸 해낼 땐 자기 앞가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기분이라 매우 기쁘다. 워셔액을 사러 가고 본네트를 열어서 붓는 걸 혼자 할 수도 있었겠지만 누가 옆에 있어서 더 잘할 수 있었다. 나는 누가 옆에 있으면 더 잘하는 사람이다. 인정 욕구가 큰 건지, 남 눈을 의식하는 건지 이 감정에 대해서도 상담선생님과 깊게 이야기해보고 싶네. 직접 도움을 주지 않아도 누가 옆에 있으면 더 잘하고, 오늘 옷가게에서처럼 내 편인 사람이 있는 것도 도움이 크게 된다. 어떤 사람 앞에선 잘하게 되고, 어떤 사람 앞에서 괜히 더 큰 눈치가 보여서 주눅이 든다. 친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든든한 느낌은 아닌 것이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쇼핑마스터님은 밝고 유쾌하고 남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람이라 내가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옷을 못 고르고 있어도 챙피해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그랬던 거 같다.

지난번에 친구들이랑 같이 똑같은 식당에서, 거의 비슷한 분위기로 친구들은 내가 오늘 옷을 산 가게 근처의 가게에서 옷을 샀는데 나는 친구들이 옷을 구경하러 간 시간에 혼자 식당에 앉아 있었다. 나는 옷 좋아하는 사람들의 옷 구경하고 고르고 사는 ‘그’ 텐션을 따라갈 수가 없다. 조금 머쓱하긴 해도 음식을 주문하고 혼자 앉아 있다가 음식이 나올 때까지 친구들이 돌아오지 않아서 불러왔다. 금방 갈게, 하고서도 바로 오지는 않았다. 기분이 나빴던가. 아니 챙피했던가.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사이니까 하면서 기다렸다. 옷가게에 따라가는 것보다 혼자 앉아있는 편이 나한테 더 낫다. 근데 그날의 그 시간이 쌓여서 오늘 내가 내 옷을 사러 갈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옷가게와 옷을 사는 행위에 그마큼 더 익숙해진 걸 수도 있고. 처음엔 누구 따라와도 너무 어색했지만 전에 그렇게 한 번 해봐서 오늘은 어색해도 용기내어 갈 수 있었던 거지.

점심시간에 번개처럼 쇼핑을 마치고 사무실로 바로 들어가기가 너무 싫어서 롯데리아에서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회사 건물로 들어섰지만 아이스크림을 다 먹을 때까지만이라도 사무실 들어가는 시간을 늦추고 싶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가는 길 중간지점의 의자에 앉았다. 콘으로 녹아서 흘러내리를 아이스크림을 내가 쪽쪽 빨아먹고, ASMR 같다며 깔깔거리다가 들어왔다. 괴로운 회사생활이지만 그나마 이 친구 덕분에 하루에 한 번은 큰 소리로 웃는다. 고맙다.

오늘은 내가 담당하는 업무의 접수마감일이어서 바빴다. 6시에 퇴근해야하기 때문에 5시까지로 접수시간을 정해두었고 나는 틈틈이 들어온 서류를 정리했다. 그리고 5시가 되자마자 모든 업무를 신속하게 정리해서 60개의 신청서를 300페이지짜리 파일 하나로 묶어서 쪽수까지 체크한 뒤 제본 맡기고, 심사위원들에게 보내고, 시간을 넘긴 신청서에는 기한이 지났다는 답장까지 쓰고 깔끔하게 50분에 퇴근했다. 촥촥촥 일이 딱 들어맞게 돌아가는 순간, 음 역시 나는 매우 쓸모가 있군 하면서 으쓱해진다.

집에 오는 길에 다음주의 장을 봤다. 내일 상담다녀오면 피곤할 거 같아서 오늘 미리 장을 봐두고 주말은 내내 주말로 보내고 싶어서다. 재난지원금이 있으니 수박과 소고기를 별 고민 없이 샀다. 다음주에 버섯을 넣고 소고기볶음 반찬을 만들어야지. 3분 카레와 짜장을 2주 내내 먹었으니 이제 좀 요리를 해볼 마음이 났다. 그리고 내일 상담 다녀와서 시원한 수박을 먹어야지. 으아, 생각만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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