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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dac May 27. 2020

호의를 받으면 그저 고맙다고 말하면 된다

피곤한 하루와 감동과 성실

오늘도 계속 머리가 아팠다. 어제처럼 30분 일찍 퇴근할 수가 없어서 퇴근하기만을, 6시가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가방을 다 싸놓고 컴퓨터도 끄고 5시 55분부터 기다린다는 시트콤 한 장면이 생각났다. 정말, 너무, 전형적인 직장인이다.

오전 내내 회의를 했다. 의미 없는 시간 낭비라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매우 피곤했다. 3시간 동안 긴장하며 상대의 의중을 살피고 어떤 의사 결정도 현재는 가능하지 않은, 매우 초기 단계의 회의.

오후에는 그럭저럭 업무를 하고 겨우겨우 시간을 버텨 퇴근 했다. 이렇게 피곤할 땐 정말 소고기만이 답이라고 생각하는데, 마트에 들르는 일이 귀찮다. 그래서 그냥 집에 왔고 집 앞 슈퍼에서 짜파게티를 한 봉 사서 끓여먹었다. 얼마 전 트위터에서 끓이는 시간과 물의 양을 잘 지키고 간장 반 술과 올리브유를 넉넉히 넣으면 맛이 확연히 달라진다는 레시피를 봐서 한번 따라해봤다. 시간을 잘 맞췄더니 면이 꼬들꼬들했고 맛도 더 있는 것 같았다. 오늘도 역시 회사 밥솥으로 밥을 2인분 해서 하나는 점심에 먹고 하나는 저녁 도시락으로 싸왔기 때문에 저녁에는 짜파게티와 밥 한 공기를 먹었다. 매우 배가 불렀다.

아,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너무 괴로워하며 엎드려 있었는데 다른 사무실에 근무하는 분이 옆에서 밥을 먹다가 자기 예전에 회사 다닐 때 힘들었던 얘기를 한참 하셨다. 지금은 프리랜서로 그런 스트레스는 없지만 전에는 각 부서에서, 여러 명의 상급자들이 자기를 너무 괴롭혔고, 그때마다 살기를 느끼며 겨우겨우 살았었단다. 그래도 어느 시기가 되니 그 마음도 조금 잠잠해졌던 기억이 있단다. 그래서 이제는 사람 때문에 얻는 스트레스는, 역시나 힘들지만 이게 시간이 지나면 감당할 수준이 된다, 끝끝내 치솟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경험적으로 알게 되어 견딜 힘이 더 생기더라고. 아주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는데 그런 얘기를 꺼낼 만큼 내가 심각해보였나. 그분이 오지랖이 넓어서 나한테까지 마음을 내주신 걸 수도 있고. 그냥,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특별히 그의 말에 위로를 받거나 그가 하는 말을 듣고 내 고통이 줄어들거나 고통을 이길 힘이 생기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누가 신경써주는 일은 고마우니까. 점심시간이 끝나서 사무실로 복귀하려고 할 때 초콜렛 한 판을 가져다주시며 먹고 힘내라고. 와, 역시 먹을 걸 받으면 감동 받는 건가 나는. 그 순간은 좀 놀랐다. 그리고 퇴근 즈음에는 사무실까지 찾아와서는 스트레스 완화에 좋다는 오일을 주고 가셨다.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도 약간 울컥한다.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왜 이걸 나한테 주는 거지? 첫인상은 그렇게 호감은 아니었는데 또 지내보니까 다르구나. (먹는 것에 약한 스타일) 평소에도 그냥 사람들에게 잘해주는 분이신가보다. 이런 생각을 하느라 또 머리를 싸매지 말고 호의를 그저 호의로 받아들여야겠다고 다짐한다. 바로 고맙다고 말하고, 그의 응원을 거름 삼아 고통을 이겨내는 힘을 더 기르면 되는 거 같다.

고마워요. 이렇게 덥석 받아도 되나 모르겠지만 그냥 힘낼게요. 도움 주고 싶어하는 마음 고맙게 받을게요. 사람의 마음을 그냥 받기도 두려운 시절이지만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맨날 같은 건물에서 보는 사람. 지인의 지인, 그리고 이제 친구가 되어가는 사이. 그냥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아픈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땐 손을 내미는 게 사람된 도리. 그냥 지금 나는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었고, 고마운 사람이 손을 내밀어준 것이다. 이렇게 조금이나마 힘을 얻고, 내일을 살 힘을 내면 된다.

저녁에는 친구들과 준비하는 일 때문에 화상회의를 한 시간 반 정도 했다. 그 일에도 다른 친구들만큼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있지 못해서 마음 한 구석이 미안하기도 한데, 지금 상황을 기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는 거다. 모두의 속도에 맞춰서.

피곤하다. 그래도 오늘도 화면 기록과 타이핑하는 손을 촬영했다. 진짜, 성실하네 나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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