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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dac Jun 01. 2020

이제 내일이 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미리미리 해치우고 나면 기분이 좋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사골육수 한 봉을 뜯어 반은 유리병에 담아 두고 반만 냄비에 끓였다. 냉동만두 세 개를 넣어 만둣국을 끓여 저녁으로 먹으려고 한다. 밥이 있으면 말아 먹겠지만 없으니 간단히 국수를 삶아 면 사리를 넣어 먹으려고 동시에 면을 삶았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피곤한 몸을 소파에 늘어뜨리고 휴대폰을 붙잡고 있으면 한두 시간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훌쩍 지나가는데 이렇게 오자마자 할 일을 해치우면 마음이 정말 편하다. 저녁을 해 먹고, 이번 주의 도시락 반찬을 만들었다.

주말에 장을 봐 두었는데 일요일에 약속이 있어서 요리를 못했다. 버섯, 토마토, 당근, 양배추를 잔뜩 사서 냉장고에 넣어 뒀다. 머릿속으로 뭐가 만들어먹을 계획을 세우기는 했다. 정확한 레시피는 없지만 호주를 여행할 때 인스턴트 스프로 뜨끈하게 끓여먹고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미네스트로네 스프, 프랑스식으로는 라따뚜이라고도 하는 모양인데 토마토를 기본으로 각종 채소들을 잔뜩 넣고 푹푹 끓인 스튜다. 닭고기를 넣어 국물맛을 내기도 하는데 치킨을 넣어도 감칠맛이 잘 사는 것 같지 않아 이번에는 아낌없이 치킨스톡을 넣었다. 제품은 맛의 평균을 잡아줄 것이다. 토마토를 삶아 껍질을 벗겨내면 좋을테지만 나는 대충대충 요리하는 사람이니 그냥 토마토 꼭지만 따내고 냄비에 넣는다. 당근과 양파를 썰어 넣고 약한 불에 물이 나올 때까지 끓인다. 그 물에 치킨스톡을 녹이고 더 끓이면서 버섯, 양배추를 잔뜩 넣었다. 음. 뭔가 맛이 부족한 거 같은데 하면서 뭐 넣을 게 있나 뒤져본다. 마늘소금, 허브소금, 후추, 타코파우더 등등 이것저것 더 넣어본다. 칠리빈 통조림도 부었다. 뭐 적당한 맛이 나오겠지. 오래오래 끓이면 재료 본연의 맛이라도 흘러나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추를 송송 썰어넣고 그냥 덮어두었다. 내일 점심에 밥을 짓고 그 위에 덮밥처럼 부어 먹을 것이다. 파스타면을 삶아 비벼먹어도 되고 빵을 찍어먹어도 되고 그것자체만으로도 든든한 식사가 될테지만 밥까지 먹으면 더 배부르고 좋지 뭐.

요리를 마치고는 회사에서 선물로 준 백미 4kg를 원래 있던 현미와 섞는 작업을 했다. 3주 전에 재난지원금으로 현미 4kg를 사면서 백미를 살까 현미를 살까 엄청 고민했는데 오늘 같은 날이 오려고 내가 현미를 샀구나. 뿌듯하다. 회사로 다른 지역에서 손님이 방문했고 쌀, 홍삼, 잣 등을 선물로 잔뜩 주셨다. 팀장님이 알아서 나눠줬다. 쌀이 갖고 싶었는데 잘 됐다.

회사에서 거의 말도 안 하고 동료들과 그 어떤 소통도 없고 회사일에 대한 애정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이렇게 쌀 받으니 덤덤하다. 내가 맡은 바 일을 무리 없이 해내기만 하면 된다로 마음이 바뀌었다. 그냥 버티고 기다리기로. 회사와 회사의 일에 너무 내 모든 것을 쏟아붓지도 말고, 나와 동일시 여기지도 말고 그저 일, 돈을 버는 수단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남한테 피해끼치지 않고 사기치지 않고 정직하게 일하기만 하면 되니까. 전처럼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과도한 책임감과 부담감으로 스스로에게 너무 큰 짐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그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실망하는 것도 지겨우니 그냥 나는 내가 만든 미래와 길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남 욕하고 원망해 무엇하랴, 나는 나의 동료와 나의 세계를 만들 것이다.

퇴근 하고 뭐했는지 적다가 여기까지 왔구나. 그렇게 쌀 소분 작업을 마치고 가지 화장실 모래를 새로 부어주고 기분 좋게 샤워를 한 뒤에 이렇게 일기를 쓰러 자리에 앉았다. 내일 도시락으로 가져갈 쌀도 씻어뒀다. 이제 자기 전까지 내가 꼭 해야 할 일은 없다. 이런 개운함! 그래서 미리미리 일을 처리하는 편인 것 같다. 미리 다 해놓으면 마음 편히 놀거나 기다릴 수 있으니까. 약속시간에도 미리 가서 근처에서 대기하다가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늦거나 일이 그르치는 것에 대해 너무 큰 두려움이 있어서 그런 걸까, 어쨌든 허겁지겁 일을 해치우는 게 싫다. 아침에 일어나 급하게 씻고 도시락을 챙기고 뭐뭐뭐를 하고.. 다 할 수는 있는데 너무 정신이 없다.

오늘처럼 이렇게 밥도 잘 해 먹고, 도시락 반찬도 다 준비해놓고, 일기도 미리미리 다 썼는데도 겨우 9시야. 그럼 지금부터 자기 전까지는 마음 편하게 하고 싶은 걸 하는 거다. 책을 볼 수도 있고 부담 없이 트위터를 하고 놀아도 된다. 미리미리, 나는 뭐든 미리미리 하는 사람.


https://youtu.be/hf4-dP8EZ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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