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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dac Jun 04. 2020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괴로웠던 하루가 덕분에 잠깐 빛났던 순간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별로였다. 어젯밤 11시에 어느 눈치 없는 사람이 회사일과 관련된 질문을 카톡으로 보냈다. 나는 잠들기 전까지 휴대폰을 붙들고 있지 않으려고 잠자리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전화기를 두고 잔다. 낮에도 밤에도 대부분 휴대폰은 무음 모드인데 어제는 깜빡했었는지 캄캄하고 조용한 한밤중에 ‘카톡카톡’ 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 더 솔직하게는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외로움이 엄습해 뒤척이다 잠들지 못하고 조금 전 벌떡 일어나 전화기가 있는 식탁으로 걸어가서는 굳이 하지 않았으면 좋을 전화를 걸고야 말았었다. 다행히도 그는 받지 않았다. 다시 핸드폰을 식탁 위에 두고 잠자리로 돌아가 누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적을 깨는 메시지 수신음.


기대반 걱정반으로 다시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확인하러 갔다. 그리고 미리보기로 보이는 수신자와 내용을 확인하고는 바로 다시 누웠다. 가나다, 라고 쓰여 있는 공지가 가나다, 가 맞냐고 물어보는 질문이었다. 나라면 밤 11시에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애써 잠을 청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가나다, 가 맞습니다. 하고 답을 하는 순간부터 기분이 영 별로였다는 점을 인정해야겠다.


지난주 상담 때였나, 서운하고 화가 나는 어떤 상황에 닥쳤을 때 너무나도 빠르고 반사적으로 그럴 수도 있지, 그럴 만도 하지 하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통에 상처받은 내 마음은 제대로 감정을 표현하지도 못한 채 억지로 묻혀버리는 경향이 있단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게 큰 일은 아니겠지만 내가 그 순간 서운했고 상처받았고 기분이 별로였다는 사실은 분명한데 그 마음을 부정하려고 든다고. 마치 별 것도 아닌 일에 기분 상하는 내가 쫌스럽고 별로인 인간이 되는 것 같은 기분 때문에. 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거야. 굳이 내가 다시 밤 11시에 그런 질문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잘 읽어보면 거기 가나다, 라고 써 있지 않냐 라고 말을 할 건 절대 아니지만.


퇴근하고 집에 와서 뚝딱뚝딱 배불리 저녁을 차려먹었는데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사진만으로 본다면 저녁밥상은 아름다웠다. 옥상텃밭에서 자란 푸성귀를 밭의 주인이 따서 나눠줬고 그 채소를 씼어서, 오랜만에 야채 탈수기를 저기 찬장 깊숙한 곳에서 꺼내서 탈탈 물기를 제거하고 잘게 썰었다. 친구가 먹으라고 챙겨줬던 김치에,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깨를 뿌려서 먹음직스러운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너무 배가 불러서 산책이라도 나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귀찮아서 그냥 한참을 앉아서 쉬었다. 휴대폰을 붙들고 한 시간 정도 지난 것 같다.

전에는 이런 시간을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일이 많았는데 상담을 다니면서는 이런 시간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월요일부터 어제까지 정말 퇴근 후에 많은 일을 했으니까 피곤할 만도 하지. 수요일인 어제는 힘들 걸로 예상했는데 의외로 기운이 넘쳐서 빨래도 하고 집안일도 많이 했었다. 아마 그래서 오늘 더 힘든 건지도 모르겠다. 휴식이 필요하니까 내 몸이 알아서 쉬고 있는 걸 거다.


그래도 성실의 아이콘으로서 오늘의 일기를 쓰고 촬영하고 내일을 위해 편집해야 하니까 무슨 이야기를 일기에 쓰지, 일기를 쓸 기분이 아닌데 하면서 손과 마음과 머리를 슬슬 굴리기 시작했다.


오후에 오랜만에 좋아하는 친구와 메신저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좋아서 손글씨 일기장에 지금의 별로인 기분에 대해서 쓰면서 친구와 나눈 대화를 필사하듯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때 다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유튜브 시작한 거 축하하고 응원해. 채널명도, 아이디어도, 기획도 구성도 다 너무 좋더라. 너의 도전이 나에게도 자극이 되고 격려가 된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어”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라는 말 뒤에 나오는 말은 대부분 심금을 울리는 고백이었다. 물론 참고 참다가 힘든 얘기를 꺼내는 경우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대부분 감동의 순간으로 기억된다. 오늘도 그 하루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나를 아는 친구이기에 영상을 보면서 나와 나란히 옆에 앉아 대화를 하는 기분이라고도 했다. 매일매일 일기를 쓰고, 그 과정을 촬영하고 공유한다. 성실하게 꼬박꼬박 작업을 이어나가는 건 다른 누구보다 나를 위한 일이었는데, 이렇게 자기에게도 힘이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다행이고 감동적이다. 마음의 날씨를 기록하는 오늘의 표에 –1점이라고 적기는 했지만 아주 조금 빛나는 순간이 있었다는 것도 기억하고 싶다.


https://youtu.be/LYNA2A_Urz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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