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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dac Jun 21. 2020

청소끝, 3년치 도시가스요금 고지서는 버렸지만...

나머진나중에 버릴 수 있을 때 버리지 뭐. 적당한 마음으로 출근해야지

일요일 저녁, 일주일의 자가 격리를 마치는 날. 흑흑. 내일이 오는 게 싫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그렇다고 죽을만큼 회사가 가기 싫으냐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집에 있는 게 회사에 있는 것보다야 낫지만 휴가를 쓰면서까지 쉬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냥 적당한 마음으로 출근해야지.

새벽에 잠들었는데도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일어났다. 현미쌀을 미리 불려 놓지 않아서 밥을 바로 할 수 없었다. 간단히 요기 먼저 하고 밥을 해야지 하면서 냉장고 안에 있는 걸로 아침을 차렸다. 달걀 2개 삶고, 토마토 하나 썰어서 물에 담궈 매운 기를 뺀 양파 반 개랑 섞고 발사믹과 올리브유 슥슥 둘러서  간단한 샐러드를 만들었다. 사과 한 개를 깎았다. 차려놓고 보니 아주 대놓고 한 끼 식사다. 나는 워낙 많이 먹으니까 이 정도로는 양이 안 찰 거라고 생각했는데 달걀이 든든해서인지 지난 며칠 간 하루에 네다섯 끼씩 먹은 게 아직 남아있어서인지 금방 배가 불렀다.


어제 치우다 만 방을 치워야 한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 잘 버리지 못해서 제작년에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강사 과정 때 공부했던 자료랑, 그 전년도에 전주에서 젠더폭력예방교육 강사 과정 때 공부했던 자료가 잔뜩 나왔다. 예술인복지재단에는 올해 강의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고, 앙평원에서 하는 보수교육을 듣지 않으면 내 자격은 상실될 것이다. 작년에는 강의를 두 번인가 세 번 했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도 강의가 들어오지 않지만, 나는 직장이 있어서 강의가 들어와도 시간을 내기 어렵고, 강의가 적성에 맞는지도 잘 모르겠다. 스스로 실력도 부족하다고 여겨져서 그만할 생각이다. 예술계의 위계에 의한 폭력에 대한 이해가 다른 강사님들만큼 충분하지 도 못하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해야지. 그렇지 않아도 우울하고 기력 없는데 도전하고 공부하고 보람을 느끼거나 성취를 느끼기엔 내 분야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인이 아니라 다른 대상, 학생이나 교직원, 관공서, 일반기업 재직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도 떠올려봤지만 절대 못할 것 같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실천하고 연대하고 노력하는 길을 택하는 걸로.

그래도 전주대학교 교수 성폭력 사건, 서울문화재단의 용역을 받아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예술가의 성폭력 사건 소식을 들으면 먹먹하다. 전주에서는 한 두 번 방청연대도 가고 그랬는데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고 한다. 후자의 예술가는 나도 예전에 일 때문에 만난 적이 있어서 충격이 크다. 아니 수업시간에 배운 대로 뻔하디 뻔한 ‘남성 예술가’의 전형적인 성폭력이어서 정말 너무 화가 나고 답답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진정서나 탄원서에 서명하는 일, 지지 의사를 밝히고 응원하는 일, 주변의 다른 여성 동료들에게 알리는 일 정도인 거 같다. 더 많이 분노하고 싶기도 하고, 같이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고 해서 너무 미안해하면서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으려고 한다. 내가, 내가 할 수 있는 걸 계속해서 하는 게 더 중요하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 공유하고 친구들에게 알리고..

점심 때부터 시작된 청소는 저녁 나절이 되어서야 겨우 끝났다. 버려야 할 자료들은 잘 찢어서 버렸다. 이 곳으로 이사온 2017년부터의 관리비, 월세, 도시가스 영수증도 이제야 버렸다. 고지서와 출금 금액을 확인하지도 않으면서 2년도 넘게 보관하고 있었다. 지난번 아파트는 2년 살다가 이사오는 덕에 이사를 계기로 모아두었던 고지서를 버렸는데 여기서는 언제 이사갈지 모르니까. 이러다가는 진짜 버릴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계속 그냥 갖고 있다가 한가득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도 다 버리지는 못했다. 이집으로 이사올 때 이삿짐 센터랑 썼던 계약서를 왜 아직까지 가지고 있니. 전에 살던 집 월세 계약서를 왜 아직까지 가지고 있니. 그냥, 버리기 아쉬워서... 나중에 버릴 수 있을 때 버리지 뭐.

그래도 책장에 책을 다 꽂았고, 버리거나 내다팔 수 있는 책을 추렸다. 갖가기 소품들과 문구류도 버린다고 버렸는데도 다 버지진 못했다. 각종 선물로 받은 새연필은 왜 이리 많니, 공책과 수첩은 좋아하고 언젠가 쓸 거라고 계속 모으고만 있고, 다 쓴 수첩도 버리기 주저하다가 결국 일기장만 남겨두고 그냥 수첩은 버렸다. 내일 회사에 가면 작년에 쓴 업무수첩도 버려야겠다.

오랜만에 출근하는 마음의 준비였을까. 하루 종일 허리가 아프도록 청소했는데도 저녁에 배가 안 고팠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할 것 같아서 밥을 하고, 마트에 이번주의 식재료를 사러 갔다. 며칠 전에 받은 재난지원금으로 결제했다. 소화가 잘 안되는 것인지 여름이라 입맛이 없는 것인지 스트레스로 위염이 도진 것인지... 결국 배는 고프지 않아서 저녁을 먹지 않았다. 국물이 적어 찌개에 가까운 미역국을 끓였다. 이번 주의 도시락으로 이용하면 될 것 같다. 그리고 내일 출근하면 밀린 일주일의 우선쓰소 영상을 올려야지! 오랜만에 회사 생활, 잘 적응할 수 있겠지. 히히히히히.

https://www.youtube.com/user/slowbad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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