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행보_完州行步 01
늦은 나이
서른과 마흔의 두 점 사이에다 내 좌표를 찍을 때 오른쪽에 훨씬 가까워진 지 오래다. 낼모레면 마흔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나이. 이제야, 드디어, 비로소, 기어코, 결국 독립을 하게 되었다. 연고도 없는 전라북도 완주군에서다. 2년 전부터 가끔 완주에 드나들면서 아는 얼굴이 생기기는 했다.
3년 전 부산 해운대 바닷가에서 커피 노점을 할 때 전주에서 온 손님이 전주 대안공간 ㅊ을 소개시켜줬고 거기서 만난 ㅇ가 1년 뒤에 한옥마을 한켠에 커피 장사를 하도록 자리를 내줬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친구 ㄱ이 숙소를 알아봐주어 만난 적도 없는 ㅈ네 집에서 2013년 여름 한 달을 보냈다. ㄱ이 ㅈ을 소개해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ㅈ은 별 뜻 없이 낄낄거리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숨이 넘어갈 정도로 함께 웃을 수 있는 친구였다.
수다 취향과 속도가 어울리는 친구를 찾게 되어 지내는 내내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ㅈ은 그즈음 완주군 고산면에 ‘홍홍’이라는 작은 가게를 열었다. 개업식날 놀러 가서 커피를 팔았던 인연으로 그 뒤로도 종종 장날 행사나 지역축제에 ‘홍홍’의 일을 도와주러 가곤 했다. 귀촌한 ㅈ의 지인들을 여럿 만나면서 지역에서 살아볼 생각을 잠깐 했던 것도 같다.
이사 같지 않은 이사
올봄 ㅈ이 여행 간 사이 가게를 대신 보고, 함께 사는 고양이를 챙기면서 한 달을 전주와 완주에서 지냈다. 여름에 떠난 발리 여행에서 예정보다 일찍 돌아와 다음 행보를 고민하다가 완주의 한 협동조합 채용공고를 발견했다. 백수생활 4년 차에 돈도 떨어져가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수는 없을 것 같아서 다시 회사를 다닐 생각을 슬슬 하던 참이었다. 그렇게 완주에서 직장인이 되었다.
당장 짐을 싸서 내려와 ㅈ집에 신세 지면서 한 달여를 지내다가 오늘 완주군으로 집을 얻어 나왔다. 여름옷만 간단히 챙겨와서 지내다가 긴팔 옷 가지러 서울에 한번 다녀온 정도라 짐이 많지는 않았다. 게다가 처음 독립하는 거라 웬만한 살림살이는 다 새로 준비해야 한다. 뭐 도와줄 게 없냐는 직장 동료 질문에 버스 타고 이사할 정도로 할 일이 없다고 말했는데 이불도 얻어오고 의자랑 냄비도 하나씩 챙기다 보니 생각보다는 짐이 많았다. 그래 봤자 승용차로 옮길 수 있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이사는 이사. 방을 한번 닦고 화장실과 싱크대를 청소하고 나서 자장면을 시켜먹었다. 독립선배 ㅈ이 알려준 대로 이삿집이라고 부탁했더니 물도 보내줬다. 이런 사소한 노하우부터 살림살이까지 앞으로 배울 게 많겠다.
여행자에서 생활인으로, 얹혀살던 동생에서 살림하는 사람으로.
서울로 대학을 온 뒤부터는 계속 언니랑 같이 살았다. 생활비를 조금 내기는 했지만 집 알아보고 계약하기, 살림살이 장만하기, 공과금 내기는 물론 집안 청소와 빨래, 장보기와 요리도 대부분 언니 몫이었다. 나는 가끔 시키는 일을 하거나 내가 먹고 싶은 걸 해먹는 정도였다. 언니와 떨어져 외국에 나가 있거나 여행을 다닐 때에는 혼자 알아서 생활을 책임져야 했지만 홈스테이, 여행자숙소 장기 체류, 친구집 등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완벽한 생활인으로 살림을 꾸리며 산 건 아니었다. 입고 먹고 자는 걸 적당히 해결할 줄 알게 되어서 독립한 것과 진배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살림이란 월세를 내고 수도요금, 가스요금, 전기요금을 신경 쓰고 비누와 세제, 수건과 휴지 등 각종 소모품을 챙기는 일, 그보다 먼저는 살 집을 구하고 계약서를 쓰는 등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일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작년 봄 여행자숙소와 달리 집만 제공되는 곳에 살면서 세제 하나 사지 못하는 내꼴이 한심해 엄청 우울해하기도 했다. 대충해먹거나 사먹어도 되는 여행자와 달리 생활인은 시장이나 마트가 멀리 떨어져있더라도 어떻게든 장을 보고 하루하루의 끼니를 챙겨야 한다. 세제가 떨어지면 사야 하고 가구나 가전제품이 고장 나면 고쳐야 한다.
시골의 낮과 밤
내가 사는 집은 읍내에서 1.5km 정도 떨어져있다. 4차선 도로가 지나기는 하지만 안쪽으로 들어와 있는 건물이라 바로 앞쪽으로는 논과 밭이, 뒤로는 계단식 논과 탁 트인 산이 보인다. 도시처럼 복잡하지 않으니 읍내풍경도 귀여운 편이다. 다시 한 번 방을 닦고 샤워를 하면서 지난주에 입은 옷을 손빨래했다. 아직은 집에 냉장고도 세탁기도 없다. 꼭 필요하면 사야겠지만 아주 천천히 사거나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고 한다.
큰돈을 쓰고 싶지 않기도 하거니와 시골로 내려온 이상 아파트에 살지언정 돈이든 물건이든 적게 쓰거나 안 쓰고, 웬만하면 직접 하면서 살아보고 싶다. 오늘은 친구네서 챙겨온 찐 고구마로 저녁을 먹었는데 자주 조금씩 장을 봐와서 해먹으면 냉장고 없이 살 수 있지 않을까. 시골은 1인 가구를 위해 소포장으로 판매하지 않으니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때 작은 중고 냉장고를 알아봐서 사면된다. 전기 없이 살겠다, 전자제품을 사지 않고 살겠다고 내세우진 않더라도 무조건 처음부터다 돈으로 손쉽게 해결하려는 습관을 바꿔보려는 것뿐이다. 솔직히 말하면 돈으로 해결하는 게 내 지금 상황에서는 쉽지도 않다. 백수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시간이 걸리더라도 직접 만들고, 직접 해먹는 식으로 살아간다면 소비를 줄일 수 있을 터다. 도시보다는 쉽겠지.
회사까지는 4km다. 당장 회사는 어떻게 다닐지도 고민이다. 걸어가면 한 시간 정도 걸리지 않을까. 정 할 수 없으면 중고자전거를 사거나 구해도 되고 카풀을 해되 될 테지. 일단 오늘 밤은 기분 좋게 자자. 역사적인 나의 독립 첫밤이다. 산 쪽으로 멀리 작고 희미하게 가로등 불빛이 보인다. 집에 불을 켜면 비현실적으로 생뚱맞게 여기만 밝아서 불을 끄고 창을 열었다. 바람은 차고 벌레 우는 소리와 새소리가 들려온다. 어둠 속에서 고구마를 한 입 베어 무니 천천히 눈이 어둠에 적응해 방 안이 어렴풋이 보인다. 설렌다. 앞으로의 내 시골 독립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