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행보_完州行步 02
두 번째 발리행
5월 7일에 발리로 떠났다가 7월 3일 한국에 돌아왔다. 떠날 때는 오래 오래 있고 싶은 만큼 놀다가 12월에나 돌아올 계획이었다. 지난번 여행에서 현지 친구도 여럿 사귀었고 커피 장사를 할 만한 장소도 눈여겨 봐놨으니 한국에서처럼 용돈 정도는 벌면서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막상 떠날 날이 다가오니 불안하긴 했지만 백수로 지내는 동안은 늘 마음이 들쑥날쑥했으니 발리에 가서도 하던 대로만 하면 다 잘 될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들은 도저히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용기는 사라지고 두려움만 커졌다. 불안함 때문인지 더운 날씨에 적응하는 것도, 현지 친구들과 편하게 지내는 것도 전보다 훨씬 어려웠다.
두 달이 다 지나도록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거의 방 안에서만 지냈다. 경치 좋은 곳에 나가서 커피 노점도 열어보고, 바닷가 쓰레기를 줍는 봉사단체에도 찾아가고, 그렇게 좋아했던 마을 뒷산과 새벽시장에도 다녀왔지만 전처럼 설레지 않았다. 하고 싶다는 마음보다 할 수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훨씬 컸다. 길거리 커피 장사를 할 수 없는 이유, 현지인처럼 생활할 수 없는 현실, 이민자처럼 사업할 수 없는 조건, 마냥 놀면서 지낼 수 만은 없는 경제적 상황을 인정하면서 신세 한탄만 했다.
나는 결국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숙소에서 보냈다. 대낮이 될 때까지 멍하니 방 안에 누워 한숨을 쉬고 밤이 되면 잠들지 못한 채 큰소리로 엉엉 울었다. 여행자처럼 기간을 정해 노는 것도 아니고, 거기 사는 사람처럼 생활하는 것도 아니고, 정착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조사나 밑 작업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여기서 뭐 하고 있지? 뭘 하고 싶은 걸까? 뭐라도 할 수는 있는 걸까? 다른 나라에서 놀면서 살면서 돈도 벌겠다는 계획이 너무 막연하고 어리석었나?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내가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던 거지.
언제까지나 운을 바랄 수만은 없지
세상에는 능력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일할 수 있는 특별한 직업을 가진 사람도 있고, 쉽게 따라하기 힘든 여행을 하면서 세계를 돌아다니는 모험가도 있다. 그들보다는 보통사람에 가까운 내가 적당히 옮겨다니며 여행하듯 사는 생활이 가능한지 도전해보고 싶었다. 이미 수년 간 국내에서 그와 비슷한 경험을 했으니 다른 나라에서도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특별한 기술은 없지만 적응도 잘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서는 대걔 비슷한 일이 벌어지니 지금까지처럼 느리게 인연을 따라가면 먹고 살만할 테지.
그런데 그 결과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정확히 알게 된 계기였다고 애써 정신승리 중이다. 동네방네 소문내고 출국한 게 민망해서 들어올 땐 조용히 돌아왔다. 이번 판은 망했다. 졌다. 실패다. 이런 생각만 가득해서 귀국 후에도 한 달여를 거의 방 안에서만 지냈다. 완주에 일자리를 얻어 출근한 지 한 달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지난 발리행에 대해 담담히 말하기가 어렵다.
실패한 선택
발리 여행에 대한 기대는 컸다. 이미 4년 동안 서울에서 제주, 대전에서 부산, 전주와 완주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사귀었다고 경험치가 쌓여갈수록 이렇게 살아가는 데 자신감이 붙었다. 발리도 사람 사는 곳이니 어떻게든 이런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길거리 커피 장사도, 도보여행 가이드도, 여행 작가도, 자전거 대여소도, 환경보호 활동도 다 하고 싶었다. 그런 얘기들을 친구들에게 하면서 커피 장사할 준비 물품도 얻고 후원금도 받았다. 판매할 발리 여행 가이드북 원고도 순식간에 썼다. 그렇게 착착 준비는 진행되었다.
작년 첫 번째 발리 여행을 준비하면서 여행기나 가이드북을 몇 권 찾아봤는데 적게 쓰고 오래 놀고 싶은 개별여행자들에게 유용한 내용은 별로 없었다. 내가 오래 머물렀던 두 지역에 대해서 직접 묶었던 숙소나 가봤던 식당, 집을 구했던 방법 등 아는 정보만이라도 정리해서 책을 만들면 어떨까, 나 같은 사람은 꼭 살 거야, 그러니 팔리겠지,라는 생각으로 ‘ㅂㅂㅇㅇ 프로젝트(가제 : 바구스 발리 아메드 앤 길리에어)’ 를 시작했다. 떠나기 열 달도 전부터 ‘ㅂㅂ 여행 프로젝트’라고 떠벌리며 자랑하면서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으니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면 더없이 아름다운 마무리가 될 듯했다. 최소한 내 삶의 방식을 응원하고 대리 만족하는 친구들에게는 팔 수 있으니까. 그렇게 원고를 준비하고 편집디자이너 친구의 초간단 과외를 받으며 책의 꼴을 완성시켰다.
발리 여행을 계획 중이었던 4명의 예약독자에게 초고 상태로 보여주긴 했는데 결국 그이들이 여행을 마칠 때까지도 책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책은 만들고 싶었다. 계획했던 일을 끝까지 마무리하면 뿌뜻하니까. 뭐든지 직접 만드는 건 신나는 경험이어서 어설프지만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것처럼 책도 직접 만들고 싶었다. 독립출판을 하는 사람도 점점 늘어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천천히 직접 다 할 생각이었는데 게으름 피우다 자꾸 늦어지니 또 귀찮은 마음도 들던 찰나 전자책 출판사를 만나 상업출판물로 나올 기회를 얻었다. 그렇게 일은 잘 풀리는가 싶었는데 결국 발리 여행은 계획대로 8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두 달만에 끝나고 말았다.
선택과 감당
막연히 잘 될 것 같다는 헛된 기대였다 해도 실망감은 컸다. 헛된 기대였다는 현실을 깨닫고 나니 내 행동이 너무 어리석게 여겨졌다. 나는 생각보다 추진력이 강하지 않았고, 용기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감당할 수 없는 큰 문제 앞에서는 무기력해지는 사람, 그런 문제는 절대로 혼자 헤쳐나갈 수 없는 사람, 동료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신이 나서 사람들에게 하고 다녔던 말과 책에 써 놓은 계획도 신경쓰였다. 계획대로 하지 못한 데 대한 실망감도 컸고 주제도 모르고 말도 안 되는 말을 떠벌렸던 것 같아 부끄러웠다.
실패한 선택 후엔 상처가 남지만 상처받은 것과 별개로 여전히 나는 또 다음을 선택해야 한다. 돌아다니며 산다는 건 매 순간 선택하고 감당하는 것이므로. 직장생활을 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라고 결론 내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돈벌이를 찾아가며 사는 동안에는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늘 선택해야 했다. 발리에서 적당히 살 수 있을 거란 예상은 틀렸다. 그렇다면 다시 전처럼 국내에서 돌아다니며 살아가야 할까? 그럴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작년부터 아니오로 기울고 있었다. 그래서 발리행을 생각하며 더 들떴던 것 같다. 안 해본 건 결과를 모르는 거니까. 진심으로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렇다면 이제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디로 가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