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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dac Nov 08. 2021

조심스런 부탁, 다정한 대답들

멀리 떨어진 지역의 행사에 초대되었다. 기꺼이 참여하겠다고 대답하고 차를 직접 운전해 갈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장거리 운전이 부담스러워서 기차나 버스를 이용하는 방법을 찾아봤더니 역시나 자차로 가는 것보다 시간과 에너지가 훨씬 많이 든다. 비용이라도 적게 들면 고려해볼만 할 텐데 그런 것도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넉넉히 잡고 조심히 운전해 가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돌아오는 길이다. 금요일 저녁 행사라 끝나고 깜깜한 밤길을 쉬엄쉬엄 돌아온다면 12시가 훌쩍 넘을 것 같다. 관광지도 아니고 큰 도시도 아니니 숙소도 마땅치 않을 테니 혼자서 아무 모텔이나 들어가서 자고 오기도 애매하다. 1시간짜리 행사에 교통비와 숙박비까지 너무 많은 비용을 들이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내가 연예인이고 매니저가 있었다면 매니저가 운전을 해줬을까, 1인 가구가 아니라 파트너나 동거인이 있었다면, 동네에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있었다면? 누군가와 함께라면 자고 오는 것도 두렵지 않을 것 같은데 같이 가자고 부탁할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금요일 오후에 편도 3시간을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정, 이 피곤한 여정에 동행할 사람은 나를 극진히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어야만 할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미안해서 그런 부탁을 할 수 없다. 떠오르는 사람은 딱 두 명이었는데 당연히 무리한 부탁이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 물어나 보라는 다른 친구의 조언에 용기를 얻어 친구1에게 물었다. 그는 전에도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비교적 가까운 지역의 행사에 함께 가준 적이 있다. 쭈뼜쭈뼛 더듬더듬 조심스럽게 물었다. “편도 2.5시간 예상되는 곳인데 지난번 **갈 때처럼 같이 가 줄 수 있어? 당연히 안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친구는 바로 대답했다. “언제?” 날짜와 시간을 말하고 왜 같이 가고 싶은지 이야기하니 다음날 일정이 무리일 수 있어서 확답할 순 없지만 영 안 되는 건 아니라고 한다. 혹시 다른 사람이 가능한지 더 알아보라고. “아니, 그렇게 어려운 부탁을 들어줄 생각을 하는 거야?? 금요일 밤에 나(같은 사람)에게 이렇게 시간과 체력을 써도 되는 거야? 생각이라도 해줘서 너무 고마워.”


친구1의 대답에 용기를 얻어 내친김에 친구2에게도 물었다. “그때 말한 그 행사 같이 갈래요?” “언제요? 특별한 일정은 없네요.” “되게 멀어요. 편도 3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 “그 때 마감 일정이나 컨디션을 보고 결정해야할 것 같아요. 바로 답하긴 어렵고.” 와, 여기도 생각보다 아주 부정적이진 않았다. 솔직히 말했다. 이건 너무 무리한 부탁일 것 같고 내가 너의 체력과 상황을 아는데 이렇게 힘든 여정에 함께 하자고 말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고. 그렇지만 혹시 모르니까 말이나 해보는 거라고. 언제나처럼 친구는 ‘혼자 섣불리 결론짓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건 너의 짐작일 뿐이고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물어보면 된다. 자신도 코로나 시기가 아니었고, 당일치기보다는 1박이 덜 힘드니 그렇게하면 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을 거라고. 


한때 나는 ‘폐 끼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기꺼이 마음을 주고받는 일은 오히려 기쁨이고 할 수 있음과 없음은 사람마다 다르니 폐를 끼치는 사람도 그 폐를 받아내는 사람도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과 헷갈리는 건 사실이다. 친구들의 다정한 대답에 눈물이 났다. 용기와 아이디어를 모아 새로운 계획을 세워본다. 전부터 서해안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하던 다른 지역의 친구3에게 제안해보기. 그의 집에서 행사장까지 오는 길이 여기에서 가는 것 만큼은 번거롭지 않을 테니 거기서 만나 둘의 여행을 시작해보는 걸로. 그는 기쁜 마음으로 고려해보겠다고 했다. 나는 답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시간이 지나는 걸 불안해하니 오늘이나 내일까지 되는지 안되는지만 답을 달라고 했다. 이런 요청을 할 수 있는 사이어서, 내가 단단해진 것 같아 기쁘다. 알았다고 오늘 안으로 결정한다고 한다. 서로가 부담없이 기쁜 마음과 원만한 방법을 찾아간다. 친구들을 생각하면 고마움에 또 눈물이 난다. 만약 친구3이 안된다고 해도, 왠지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친구4, 친구5에게 제시할 매력적인 안들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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