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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우선쓰소

조심스런 부탁, 다정한 대답들

by badac

멀리 떨어진 지역의 행사에 초대되었다. 기꺼이 참여하겠다고 대답하고 차를 직접 운전해 갈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장거리 운전이 부담스러워서 기차나 버스를 이용하는 방법을 찾아봤더니 역시나 자차로 가는 것보다 시간과 에너지가 훨씬 많이 든다. 비용이라도 적게 들면 고려해볼만 할 텐데 그런 것도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넉넉히 잡고 조심히 운전해 가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돌아오는 길이다. 금요일 저녁 행사라 끝나고 깜깜한 밤길을 쉬엄쉬엄 돌아온다면 12시가 훌쩍 넘을 것 같다. 관광지도 아니고 큰 도시도 아니니 숙소도 마땅치 않을 테니 혼자서 아무 모텔이나 들어가서 자고 오기도 애매하다. 1시간짜리 행사에 교통비와 숙박비까지 너무 많은 비용을 들이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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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연예인이고 매니저가 있었다면 매니저가 운전을 해줬을까, 1인 가구가 아니라 파트너나 동거인이 있었다면, 동네에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있었다면? 누군가와 함께라면 자고 오는 것도 두렵지 않을 것 같은데 같이 가자고 부탁할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금요일 오후에 편도 3시간을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정, 이 피곤한 여정에 동행할 사람은 나를 극진히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어야만 할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미안해서 그런 부탁을 할 수 없다. 떠오르는 사람은 딱 두 명이었는데 당연히 무리한 부탁이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 물어나 보라는 다른 친구의 조언에 용기를 얻어 친구1에게 물었다. 그는 전에도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비교적 가까운 지역의 행사에 함께 가준 적이 있다. 쭈뼜쭈뼛 더듬더듬 조심스럽게 물었다. “편도 2.5시간 예상되는 곳인데 지난번 **갈 때처럼 같이 가 줄 수 있어? 당연히 안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친구는 바로 대답했다. “언제?” 날짜와 시간을 말하고 왜 같이 가고 싶은지 이야기하니 다음날 일정이 무리일 수 있어서 확답할 순 없지만 영 안 되는 건 아니라고 한다. 혹시 다른 사람이 가능한지 더 알아보라고. “아니, 그렇게 어려운 부탁을 들어줄 생각을 하는 거야?? 금요일 밤에 나(같은 사람)에게 이렇게 시간과 체력을 써도 되는 거야? 생각이라도 해줘서 너무 고마워.”


친구1의 대답에 용기를 얻어 내친김에 친구2에게도 물었다. “그때 말한 그 행사 같이 갈래요?” “언제요? 특별한 일정은 없네요.” “되게 멀어요. 편도 3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 “그 때 마감 일정이나 컨디션을 보고 결정해야할 것 같아요. 바로 답하긴 어렵고.” 와, 여기도 생각보다 아주 부정적이진 않았다. 솔직히 말했다. 이건 너무 무리한 부탁일 것 같고 내가 너의 체력과 상황을 아는데 이렇게 힘든 여정에 함께 하자고 말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고. 그렇지만 혹시 모르니까 말이나 해보는 거라고. 언제나처럼 친구는 ‘혼자 섣불리 결론짓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건 너의 짐작일 뿐이고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물어보면 된다. 자신도 코로나 시기가 아니었고, 당일치기보다는 1박이 덜 힘드니 그렇게하면 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을 거라고.


한때 나는 ‘폐 끼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기꺼이 마음을 주고받는 일은 오히려 기쁨이고 할 수 있음과 없음은 사람마다 다르니 폐를 끼치는 사람도 그 폐를 받아내는 사람도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과 헷갈리는 건 사실이다. 친구들의 다정한 대답에 눈물이 났다. 용기와 아이디어를 모아 새로운 계획을 세워본다. 전부터 서해안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하던 다른 지역의 친구3에게 제안해보기. 그의 집에서 행사장까지 오는 길이 여기에서 가는 것 만큼은 번거롭지 않을 테니 거기서 만나 둘의 여행을 시작해보는 걸로. 그는 기쁜 마음으로 고려해보겠다고 했다. 나는 답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시간이 지나는 걸 불안해하니 오늘이나 내일까지 되는지 안되는지만 답을 달라고 했다. 이런 요청을 할 수 있는 사이어서, 내가 단단해진 것 같아 기쁘다. 알았다고 오늘 안으로 결정한다고 한다. 서로가 부담없이 기쁜 마음과 원만한 방법을 찾아간다. 친구들을 생각하면 고마움에 또 눈물이 난다. 만약 친구3이 안된다고 해도, 왠지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친구4, 친구5에게 제시할 매력적인 안들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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