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으로 떠날 결심을 했던 밤에는 짐을 챙기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지난 번 서울 다녀올 때 그렇게 가지가 힘들어했는데 내가 가지를 데리고 또 먼길을 갈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주섬주섬 짐을 꾸렸다.
가장 중요한 화장실, 평소에도 좋아하던 패브릭 리빙박스, 스크래처, 낯선 장소에서 도움이 될 만한 애착이불, 5일치 사료를 챙겼다. 오랜만의 여행이라 인간인 내 몫으로는 뭘 챙겨야할지 감이 잘 오지 않아서 잘 때 입을 옷 1벌, 속옷 2장, 양말 2개, 상의 내복 1장, 칫솔을 챙겼다. 청바지와 맨투맨 후드, 실내에서 입을 경량 패딩에 겉옷으로 제일 두껍고 긴 패딩을 입었다.
조금이라도 익숙해질까싶어 옷장 위에 올려뒀던 이동장을 내려 사료그릇을 그 안에 넣어두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가지가 밥을 한참 안 먹더니 눈치 보다가 이동장에 머리만 넣고 사료를 집어와서 밖에서 먹는다. 병원 갈 때마다 점점 더 이동장에 들어가기 싫어해서 고생이었는데 이번엔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캣타워 위에 올라가거나 소파 밑으로 숨어버리면 잡지 못하니까 가지가 작은방으로 갔을 때 얼른 문을 닫고 어르고 달래고 빌면서 잡아서 겨우겨우 이동장에 넣었다. 울고불고 난리다. 신경질이 많이 날테지.
가지야 미안. 그런데 우리는 오늘 먼 길 갈 거야, 안 그러면 나한테 큰일이 날 거 같아. 가지한테 힘든 거 알지만 인간은 지금이 너무 힘들다.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어쩔 수 없지만 우리는 한 팀. 조금만 나를 봐줘, 정말 미안. 최선을 다해 네가 너무 힘들지 않게 할게. 너 때문에 아무 것도 못한다는 원망을 하고 싶지는 않아. 내가 불행해져서 너를 미워하게 될까봐 겁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거 같아서 그러는 거야. 설명해서 이해시킬 수는 없겠지만 내가 이기적이라는 것도 알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큰일이 날 것만 같아.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가지를 이동장에 넣고 현관 앞에 대기시켜 놓은 다음 차근차근 짐을 차로 실어 날랐다. 뒷좌석에 화장실을 놓고, 패브릭 상자랑 스크래쳐랑 자리 잡고 가지를 데려왔다. 역시나 목이 터져라 서러운 울음을 운다. 정말 인간이 너무 잘못했다. 미안하다.
가지의 이동장은 반구 형태로 된 우주선 모양인데 보조석에 놓고 손잡이 부분을 벨트로 고정한다. 인간이 여기 있어. 걱정하지마. 안전하게 강릉까지 가보자. 쉬엄쉬엄 갈 거야, 가다가 가지 힘들면 휴게소에 들를 거야. 나를 위한 다짐, 가지를 위한 애원과 설득, 알아듣길 바라면서 계속 말하고 또 말하다가 가지가 너무 울어서 조금만 열어 손으로 쓰다듬어주고 싶어졌다. 그런데 역시! 그 사이에 가지가 이동장 밖으로 튀어 나와 조수석 아래쪽으로 깊숙히 들어갔다. 안전벨트가 채워진 채로 이동장의 문을 열다가 벨트가 이동장 문 사이에 끼는 바람에 잠깐 우왕좌왕 벨트를 정리하는 사이 가지가 탈출했다. 가지를 다시 잡아서 이동장에 넣어야 하는데… 내가 손을 대려고 하면 너무너무 화를 낸다. 내가 모른척 가만히 운전석에 앉아있으니 가지도 얌전히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하.. 어떡하지, 이제 출발해야 하는데. 이 상태로 운전하면 안 되겠지? 혹시 될까? 가지는 어렸을 때 산책도 하고 나랑 같이 차를 타고 읍내에 아르바이트로 같이 갔던 고양이잖아. 갑자기 튀어오르거나 그런 적은 없잖아. 혹시 이동장에 넣지 않고 저런 상태로 운전을 해도 괜찮을까. 얌전히 저렇게만 있어준다면 괜찮을 거 같기는 한데... 천천히 가볼까. 고양이 중에는 얌전히 차를 타는 경우도 있다던데 혹시 우리 가지가 그런 고양이일지도 모르잖아. 그래 어짜피 주유는 해야하니까 주유소까지만 가보자! 그래서 천천히 출발했다. 도로에 차가 거의 없는 길이고 잘 아는 동네 길이기 때문에 그러면 안되지만 엄두를 내본 거다. 가지는 꽤 얌전했다. 인간이 내리고 타느라 문이 열리는 순간 가지가 뛰쳐나갈 수도 있으니 온 신경을 집중해서 주유소에 도착해서는 후다닥 내리고 다시 탈 때도 가지를 보조석으로 유인해놓고 재빨리 운전석으로 타기 같은 방법을 썼다. 오, 혹시 더 멀리 갈 수도 있으려나. 절대 절대 그러면 안 되지만 가지가 보조석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상태로 주유소를 나섰다. 진짜 정말 절대 그러면 안 된다.
처음 몇 분은 얌전히 있었지만 슬슬 차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뒷좌석을 타고 올라가 트렁크 선반에 앉아 뒤에 따라오는 차 구경을 한다. 뒤에 오는 차가 신고라도 하면 끝이야 가지야 제발 내려와 아까처럼 얌전히 앉아 있으면 안 되겠니? 차를 세울만한 곳을 찾아 조치를 취해야 했다. 급기야는 운전 중인 내 무릎에까지 올라왔다. 이제 정말 큰일이다. 끝이다. 당장 차를 세워야 한다. 대시보드에 올라가는 것도 문제고, 내 무릎에서 운전을 방해하는 것도 큰일이다. 차를 세우기 전에 사고 나면 어쩌지, 그럼 가지도 나도 정말 끝이야. 와, 인간이 생각이 짧았다. 정말 우리 둘 다 죽기 전에 얼른 멈추자. 아주 잠깐 이러다 사고 나서 죽으면 행복한 죽음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절대 그러면 안 돼지. 멀쩡하게 달리던 다른 차가 나 때문에 사고날 수도 있잖아. 차를 세우고 크게 쉼호흡을 하고 깊이 깊이 반성도 하고 진정했다. 그리곤 운전석을 최대한 뒤로 밀어 내가 움직일 여유 공간을 확보했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우리를 위한 일이야. 기다렸다가 가지가 보조석 위로 올라오는 순간 담요로 가지를 포획해서 케이지에 넣었다. 울어도 어쩔 수 없어 가지야. 정말 우리 이러다 죽을 수도 있어. 아무리 얌전한 고양이라고 해도 운전중인 차 안에 고양이를 풀어놓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갑자기 운전자에게 뛰어들 수도 있는데 그러면 바로 사고로 이어질 것이다. 아무리 우리 고양이가 얌전하다고 해도 도로에서 옆 차가 경적을 울리거나 급정거 같은 돌발 상황에 깜짝 놀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가지 울음 소리를 견뎌가며 계속 말을 걸고 노래하면서 운전했다. 그래도 가지 울음 소리가 서럽고 하염없어지기 전에 졸음쉼터나 휴게소에 멈췄다. 30분에 한 번씩은 멈춘 것 같다.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을 테지만 나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케이지 문을 열어주면 나와서 울음을 멈추고 화장실에 가서 오줌도 싸고 똥도 쌌다. 밥도 먹었는데 물은 마시지 않았다. 썩 좋은 컨디션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화장실에 가고 밥도 먹는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럽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쉬엄쉬엄 6시간 넘게 운전해서 강릉에 도착했다. 지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다. 코로나로 정상 영업을 하고 있진 않은데 지인 찬스로 받아주셨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니 다리가 후덜덜 하다. 정말 가지도 나도 너무너무 고생했다. 케이지를 열어주니 가지는 대시보드로 훌쩍 뛰어 오른다. 그래 일단 너도 좀 진정하렴. 나도 좀 진정하자. 큰일 했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