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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우선쓰소

어겨도 상관없는 약속은 없겠지만

by badac

나는 초중고 12년 내내 학교에 빠진 적이 없다. 아파도 학교에 꼭 가야 한다는 집안 분위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성실해라, 게으름 피우지 말아라, 약속을 지켜라, 거짓말하지 말아라 등이 집안의 중요한 가르침이기는 했다. 학교에 가기 싫다거나 아픈데도 힘들게 학교에 갔던 기억은 없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학교 가는 게 재미있었을 것이다. 4남매 중 막내로 특별 대우를 받느라고 언니 오빠 아무도 다닌 적 없는 유아원과 유치원에 입학했는데 두 번 다 재미없다고 중간에 그만 뒀다고 한다. 학교에 보내놓고 재미없으니 안 다닌다고 할까봐 걱정했는데 학교는 그만둔다는 소리를 안해서 다행이었다고 가족들은 증언한다.


학생은 당연히 학교에 가는 거였다.학창시절에는 학교에 가기 싫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고등학생 때 자율학습을 빼먹고 학교 뒤편 놀이공원에 바이킹 타러 다닌 적은 있어도 학교 수업을 빼먹은 적은 없었다. 시험 공부 열심히 하고 더 좋은 성적을 내고 싶어하는 학생이었다. 숙제를 안 하거나 늦게 내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기로 한 건 당연히 해야 한다고 믿었다. 대학생이 되었어도 수업을 빠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출 도서의 반납일도 어지간하면 넘기지 않으려고 하고, 하기로 한 일은 완성도 보다 마감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었다. 쓰는 손과 마음이 굳어버리지 않도록 닷새에 한번씩 셀프 마감을 두겠다는 약속도 이렇게 세 달 가까이 지켜오고 있다. 아주 좋은 글을 쓰고 있진 못하지만, 일단 쓰는 패기와 계속 쓰는 끈기만큼은 칭찬할만 할 테니까.


살다보니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이해하지만 아플 때도 일단 출근한 뒤 다시 퇴근하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살다보니 약속에 늦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에 마음이 유독 불편하다. 게다가 내가 도대체 얼마나 아파야 멈춰도 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참는 것이 익숙한데, 잘 참는다고 칭찬 받고 자라서 더 잘 참는 사람이 되어버려서 어지간하면 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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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멀리 다녀온 후 몸이 너무 피곤해서 일요일과 월요일 내내 누워있었다. 나이가 들어서 체력이 전과 같지 않으니 더 오랜 휴식이 필요하다. 온라인 일정 하나는 겨우 소화하고 나머지는 모두 취소했다. 몸이 힘들어서 쉬기로 결정했고 그랬어야만 하는 게 맞는데 여전히 마음이 조금 찜찜하다. 무언가 내가 해내지 못해서 번복했다는 느낌, 죽을 만큼 아픈 것도 아닌데 결석한 느낌, 어떤 약속은 남은 에너지를 모두 짜내서 지키고, 어떤 약속은 그보다 쉽게 취소한다. 그런 내가 공정하게 느껴지지 않아서 싫은 거다. 그럴 수도 없으면서 실제로 그렇지도 않으면서 티끌 같은 잘못도 하기 싫은 걸까. 그걸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안잖아? 아마 상대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겠지. 이건 되고 왜 저건 안되는 거야? 제멋대로구나.이런 평가를 받을 까봐. 스스로를 평가한다. 도저히 맞출 수 없는 기준으로.


어겨도 되는 약속 따위가 있을 리는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은 언제나 생긴다. 타인의 사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자신에게도 관대할 것. 그럴 수 밖에 없는 인간을,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을 이해할 것. 너무 가혹한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지 말 것. 오랜만에 오늘도 다짐 한 번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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