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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우선쓰소

쓸 수 있는 게 세 시간밖에 없어

by badac

오늘 하루는 7시에 시작되었다. 저녁 7시. 해뜨는 시간에, 혹은 그보다 일찍 하루가 시작되던 아침형 인간이던 시절이 있었다. 5시에 일어나 커피를 내려마시고 느긋하게 어제의 일기를 쓰고, 창밖을 보며 여유롭게 출근시간을 기다리곤 했다.


9시에 일어나기는 했다. 아침 9시. 빠질 수 없는 온라인회의를 10시까지 참석하고 일어난 김에 하루를 시작해볼까 한껏 게을러진 나를 몰아부쳐 밥을 지었다. 여기까진 성공. 먹을 만한 반찬이 없어서 새송이버섯과 당근을 썰어 에어프라이어에 구웠다. 밥은 살짝 타서 갓지어 뽀송하다기보단 딱딱한 누룽지가 되었다. 자극적인 맛이 당겨서 라오간마, 삼발소스를 넣고 비벼먹었다. 마라맛이 제법 났다. 식사를 마치고도 허전한 마음이 계속됐지만 더 먹을 게 없어서 벌떡 일어나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를 마치면 배가 부를거야, 그러면 이 허기와 헛헛함과 욕구불만이 사라지겠지. 제발 그래야할텐데.


소파 위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어제처럼 도서관이라도 가야 하루를 무의미하게 흘려보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텐데 아침에 일찍 일어났으니 조금 게으름을 피워도 되지 않을까 하면서 밍기적거렸다. 으아아아악. 나가고 싶지 않아. 이럴 줄 알고 빌려온 소설책이 있으니까 그걸 읽으면서 슬슬 나를 작동시켜보려고 단편 소설 하나를 읽고 나도 모르게 잠들어버렸다.

앗. 이러다가 하루가 훌쩍 가버릴 것 같아. 오늘 저녁까지 꼭 해야할 숙제가 있는데, 8시전까진 마쳐야 하는데, 주말에 할 시간이 없으니 오늘밤에 해야하는데…하면서 계속 누워있었다. 이 무력함에 또 짜증이 난다. 뭐라도 먹어야겠다. 사과랑 치즈를 먹었다.


벌떡 일어났다. 햇볕! 햇볕을 쬐자. 눕지 말고 앉고, 나가서 걷자. 때마침 커피도 떨어졌으니 커피를 사러가자. 오후 2시. 때이른 여름이 왔다가 어제 다시 추워지더니 오늘은 다시 쨍쨍하다. 반팔티를 입고, 얇은 긴팔 남방을 걸치고 카페를 향해 걸었다. 길가 꽃이 아름다워 잠깐 멈췄다가 계속 걸었다. 돌아오니 49분이 지나있다. 다행이다. 이 정도면 오늘의 잘한 일에 한줄은 채워넣을 수 있겠다.


아, 생리를 앞두고 있어 그런 거긴 하겠지만 정말 마음에 안 든다. 불확실한 미래도, 쌓아둔 것 없는 커리어도, 마음 붙일 든든한 상대도, 뭔가 여전히 헛헛한 뱃속도. 정신을 못차리게 매운 걸 먹으면 나으려나.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반조리 냉동떡볶이를 샀다. 이거 얼마인지만 봐주세요. 네이버페이에 8천원이 남았으니 그 가격을 넘으면 사지 말아야겠다고 마지막까지 허술한 방어벽을 세워보지만 가격은 7천원이 조금 안됐다. 샀다.


떡볶이를 만들었다. 라오깐마, 청양고추를 썰어넣었다. 아주 맵진 않았다. 분명 1인분이 아닐텐데 그냥 다 먹었다. 이제 단 걸 먹을 차례, 집앞 편의점에 다시 가봤자 만족스런 디저트가 있을리 만무. 집에 있는 것 중에 먹을 만한 게 있을까. 와플 생지! 그래 크로플 비슷하게 샌드위치 메이커에 눌러서 만들어보자. 미처 해동도 하지 않은 생지가 미끌거리면서 자꾸 기계 밖으로 삐져나왔지만 어떻게 어떻게 해서 겨우 구워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전기가 나갔다.


이걸 처음 쓰는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차단기가 내려갔지? (매우 오랜만에 쓰는 것이기는 하다) 차단기를 올리고 콘센트에 꽂고 떨어지고, 다시 차단기를 올리고 혹시 멀티탭이 용량이 작아서 그런가 벽에 바로 있는 콘센트에 꼽아보고 떨어지고, 다시 다시 차단기를 올리고 혹시 이 벽 말고 저 벽에 있는 콘센트는 괜찮을까 싶어 꼽아보고 떨어지고, 다시 다시 올려보고 또 떨어지고… 이 기계는 이제 더이상 우리집에서 사용못하나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찌부러진채로 버터가 녹아서 흐물흐물해진 크로와상 생지를 에어프라이어에 구웠다. 와플도 아닌 당연히 크로와상도 아닌 무언가가 구워져나왔다. 맛은 없었다. 그래도 다 먹었다.


6시가 되고 말았다. 앗. 퇴근 시간. 이제 정말 더는 미룰 수 없어! 책상에 앉아본다. 시계를 본다. 7시다. 저녁 7시. 하.


아무것도 하기 싫은 이 마음을 일기에 쓴다. 그리고 지금 당장 해야할 일에 대해 생각한다. 숙제 해야하고, 한 시간 후에 동료상담 자조모임 해야하고, 5일 글장 글을 하나 써야하고, 오늘의 그림일기도 그려야 하고… 모임 전까지 1시간, 모임 마치고 2시간. 다 할 수 있을까. 오늘따라 차질이 생겨서 모임이 늦게 시작되어 늦게 끝났다. 10시반, 오늘 하루가 1.5시간밖에 안남았다. 네이버 매일 열시 무료 웹툰은 봐야한다. 서둘러 만화 한 편 보고, 지금 당장 해야하는 일, 가장 중요한 마감의 우선 순위를 정한다.


5일글장을 빼먹을 순 없다. 글을 쓰자. 뭐가 되도 좋으니 일단 쓰자. 매일매일 똑같이 하루 있었던 일만 쓰는 일기는 좋은 글이 아니라고 누가 그랬나. 작가가 되라, 출판을 하라, 일기 그만 쓰고 에세이를 쓰라는 온라인 강의의 광고 문구였다. 뜨끔했다. 나는 아직도 이런 시시콜콜한 일기를 쓴다. 그리고 한 시간 안에 마감을 칠 수 있으면 오늘의 그림 일기도 그리자. 못 그리면 지난 번에 그려놓고 인스타그램에 올리지 않은 자전거 그림을 올리자. 자기만족이지만 하루의 펑크도 용납할 수 없다.


얼른 그림 그리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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