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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좋은 날들

by badac

지난 한 주의 일기장을 뒤적거려본다. 서울 병원도 가고, 식사 초대도 한 번 가고, 도서관에도 다녀왔는데 하루 빼고는 그저그런 날(0점)이다. 2019년부터 그날의 기분 날씨와 마음 온도를 점수로 매겨 한 장의 표로 그리고 있는데, 망했다(-3), 되게 별로(-2), 좀 별로(-1), 보통(0), 좋은 편(+1), 진짜 좋아(+2), 아름답고 고마운 날(+3)의 7단계로 표기한다. 보통은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 데다가 별다른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마음과 기분에는 큰 변화가 없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마음도 생각보다 불안하지 않고, 사람 많은 자리에 다녀와 약간 지쳤지만 혼자 가만히 있다보면 쭈그러든 가슴이 펴지는 느낌도 든다. 제작년쯤이었다면 이런 날은 당연히 -1점을 줬을 텐데 요즘은 어지간해서는 0점이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보통의 날들.



여전히 조금 지루하고 답답하다. 상담 선생님은 과거의 나처럼 극단적으로 에너지가 넘치거나 한없이 한없이 가라앉는 대신에 적당히 심심하고 평범한 날들을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렇게 계획이나 목적 없는 시간을 가져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래, 완주에 와서 처음 다녔던 직장을 그만 둔 뒤에는 퇴직금을 털어 석 달짜리 PT를 등록했고, 타로 리딩을 배웠고, 취업성공패키지 프로그램을 이용해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육 강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다. 다음해에는 젠더폭력 예방강사가 되는 과정을 이수했다. 작년에 두번째 회사를 그만두고는 책 쓰는 일에 집중해서 도서관 작업실로 6개월 동안 출근했었다. 프리랜서로 작업할 일도 몇 건 있어서 바쁘게 지냈다. 올해는 정말, 2월 초에 아르바이트로 마무리한 일을 마친 뒤로 아무런 계획이 없다. 작년에 인터뷰만 해놓고 묵혀둔 원고를 쓸 수도 있고, 뭔가 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새 책을 쓰고도 싶은데 딱히 구체적인 뭔가가 떠오르진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하고 있을 내가 아니어서 이렇게 5일글장으로 뭐라도 쓰고, 4월부터는 매일매일 아이패드 드로잉을 인스타에 올린다. 일기도 매일 쓴다. 이번주부터는 온라인 영어수업도 듣기 시작했다.


하는 게 없진 않은데, 목표나 방향이 없어서 모호하게 느껴진다.영어공부도 막연히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지 무엇을 위해 잘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읽고 싶은 영어 텍스트가 있다거나 자막 없이 영화를 보고 싶다거나 업무에 활용하고 싶다는 등 목표가 없다. 워킹홀리데이 다녀오고 나서 가끔 메일을 주고받는 호주의 지인에게 막힘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기는 하다. 친구는 우스개로 영어로 글을 쓰는 것을 목표로 하라고 하는데 언감생심 그게 가능이나 할까 싶다. 그나마 책을 읽는 건 뭔가 생산적인 준비를 하는 느낌이라 그나마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가 읽는다. 에세이, 소설, 만화 등.


어제는 희망도서 신청한 책이 들어왔다고 해서 도서관에 다녀왔다. 간 김에 밀린 영어공부를 조금 했다. 혼자서는 공부를 안하니까 수업을 들으면 매일매일 영어공부를 열심히 할 줄 알았는데 역시 여전히 너무 하기 싫다. 겨우 두 시간 앉아서 수업 자료를 읽고 잘 모르는 단어의 예문을 적어보다가 집중력이 훅 떨어지고 마스크 때문에 귀가 아파서 집에 왔다. 공부가 재밌고 두 시간이나마 공부를 했다는 사실이 뿌듯해서 하루의 점수를 1점 정도는 줘도 될 것 같다가도 그만그만한 하루였지 하면서 보통의 날로 마무리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집에 계속 있다보면 입이 심심해서 뭔가 계속 간식을 먹게 되는데 몸이 부쩍 무겁고 삐걱거리는 거 같아서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고 중간에 라면 먹고 싶은 마음, 과자 사다 먹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렇지만 오전 내내 공부도 뭣도 하기 싫어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어제 빌려온 책이나 읽으려고 책상 위에 앉아있다가 봄볕 따뜻한 바깥에 비해 너무 추워서 볕드는 베란다로 나가서 책을 보다가 결국 잠들었다. 이렇게 또 무기력한 하루가 지나가는 건가. 너무 추워서 옷을 껴입고 보일러를 틀었다. 그러다가 잠깐 밖에 나가서 볕을 쬐면서 책을 읽었다. 늦은 오후에 영어 공부도 조금 했다.


나는 오늘의 일기에도 0점을 적을 것이다. 이렇게 쓰다보면 오늘 하루 어떻게든 잘살아보려고 애쓴 내가 보이는데 이렇게 나는 내게 박하구나. 지금 이 글을 적으면서 감정이 올라온다. 전같았으면 나는 이런 오늘에게 -1점을 줬을 거다. 하루 종일 집에서 뭘 한 건지도 모르게 시간만 보냈다 라거나 그럴 거면 아침에 도서관에 가서 두어시간이라도 집중해서 공부를 했었어야지 하는 후회를 하면서. 하루 아침에 자신을 비난하고 나무라던 내가 스스로를 긍정하고 칭찬하고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거다. 그냥 이런 나를 다그치지 않는 것으로도 충분히 잘했다고 생각한다. 오늘 같이 눈에 띄는 성과가 없다고 느껴지는 날도 좀 별로(-1)라고 느껴지지 않는 게 어디냐. 그럭저럭 버티면 살아내고 있는 것 같다.


그림을 그릴 때는 억지로라도 행복한 순간을 찾아보는 연습을 한다. 울적한 마음을 보통으로 여기는 걸 하다보니 조금 좋은 것도 보통으로 여기는 것 같아서다. 전반적으로 감각이 좀 무뎌지는 느낌. 과대포장을 해서라도 매일 기쁨과 행복을 찾아낼 거다. 잘 차려진 한 끼 식사이기도 하고, 부드럽게 날리는 꽃잎이기도 하고, 다정한 친구의 한마디이기도 한 순간. (이걸 그림으로 그려내는 건 또 다른 차원이기는 하지만.)


오늘의 행복한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미루고 미루다가 장날의 글쓰기를 하던 중에 울컥 올라온 감정, 글쓰기를 통해 발견한 깨달음, 스스로를 격려하고 위안받는 다정함 같은 것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아, 요즘 내 일기장에 너무 0점만 가득한 거 아니야? 이러다 감정이 메말라 버릴 것 같은데… 하는 마음이었다. 상담하면서도 느낀 건데, 나는 너무 부정적인 판단이나 상상을 많이 하는 편이다. 0점이 계속되는 일기장이 썩 못마땅했던 거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는 사람이 될까봐. 그런데 글을 쓰다보니 알게 되었다. 나쁜 것들을 나쁘게만 느끼지 않는 상태로 겨우 옮겨왔다. 실은 나쁜 것들도 아니었으니까. 불안하고 우울하지는 않는데 기쁘지도 않아요. 그래서 너무 밍밍하고 이상해요. 이런 느낌에 충분히 감격해도 좋을 텐데… 이제 그다지 우울하지 않아? 너무 축하할 일이잖아! 마음껏 축하하고 기뻐하고 즐기자. 이 심심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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