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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우선쓰소

연체 도서 반납하러 간 날

by badac

차 문을 열자 훅 더운 기운이 밀려온다. 차를 세울 땐 그늘이었는데 어느새 뜨거운 해를 그대로 받고 있었다. 마트에서 사온 쥬스랑 치즈랑 소스랑 식빵이 상하진 않았겠지? 얼른 가서 장 본 물건을 정리해야겠다. 차에 시동을 걸었다.


등이 여전히 뜨겁다. 한 시간 정도였나, 도서관 야외 테라스 공간에 앉아 있었다. 잘 꾸며진 카페처럼 깨끗하고 날씨도 좋았다. 마저 읽고 반납하려고 가져갔던 책을 꺼냈다. 왔다갔다하면서 전화통화하는 사람, 현장 회의를 하는 관계자들, 뜨거운 햇살 때문에 집중이 되지 않아 책읽기는 그만두었다. 노트북을 꺼내 늦은 친구 생일 선물을 주문했다. 햇빛에 반사되어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의 할 일 중 하나 정도는 완료하고 싶어서 겨우 성공시켰다.



아침에 대출도서 연체 연락을 받았다. 전주도서관은 사후 공지라 잊지 않으려고 독서대에 집게로 잘 보이게 꽂아놨는데도 깜빡했다. 우리 동네 완주 도서관은 하루 전에 내일까지 마감이라고 알려줘서 아차차 하고 반납을 하곤 했는데 전주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면 연체가 잦다. 게다가 오늘은 월요일이라 도서관 쉬는 날이고 내일은 서울 가는 날이라 전주도서관에 들르러면 동선이 복잡해져서 한숨이 난다. 문 닫는 날에도 반납할 방법이 있겠거니 싶어서 한 번의 외출로 마트와 도서관 업무를 마치려는 계획을 세웠더랬다.


집에서 제법 가까운 곳에 이마트가 생겼다. 도시에 갈 때 역이나 터미널에 붙은 큰 마트 구경하기를 즐기는 사람이라 이마트가 생기기만 하면 자주 갈 줄 알았는데 그땐 가는 길에 마트가 있어서 들르는 거였지 나는 쇼핑만을 위해 마트에 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3월을 심심하게 보내고 4월엔 평범한 하루의 생활 속에서 행복과 기쁨을 샅샅이 캐내고 말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마트 방문도 행복채굴을 위한 도전 혹은 에피소드 제조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역시 어마어마한 물건들이 나를 압도할 것 같아서 정신이 혼미하다. 그래도 천천히 살펴보면서 우리 동네에 안 파는 제품들 위주로 이것저것 샀다. 발리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삼발 소스, 요즘 요리하기 귀찮아서 자꾸 대충 먹고 채소도 잘 안챙겨먹길래 샐러드 소스도 3종류나 골랐고, 친구가 추천한 라오깐마 라조장, 우리 동네에선 안 파는 소이마요, 고다치즈, 플레인 탄산수 같은 것들을 샀다. 신선식품은 사지도 않고 공산품 위주로 몇개 골랐는데도 6만원이나 나와서 조금 놀랐다.

마트에서 지척인 도서관으로 갔다. 휴관일이니 외부의 책 반납함에 넣고 오면 되겠거니 싶었는데 주차장에 차가 가득이다. 자료실만 휴관이고 열람실은 열어서 이용자가 많았다. 어슬렁 거리며 도서관 입구의 자동반납기계로 다가갔다. 연체도서는 반납이 불가하단다. 혹시 몰라 책을 대봤지만 삑! 자료실에 직접 반납하라는 안내가 반복된다. 하... 내일 다시 와야 하나. 황망한 마음에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 싶어서 괜히 도서관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아침의 게획은 아직 덜 읽은 책 한 권을 도서관에서 마저 읽고 반납한다. 틈틈히 노트북으로 뭔가를 쓰거나 할일을 한다, 였다. 새롭게 단장한 열람실은 깔끔했지만 너무 독서실 같아서 답답했다. 야외 테라스 공간에 앉아 따뜻한 햇볕을 느끼며 앉아 있었다. 금방 뜨거워졌다. 그렇게 뭔가 한듯만듯,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듯, 어정쩡하게 어쩔줄 몰라하다가 내일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1층 출입문으로 나오기 직전 물조리개를 든 직원이 분명해 보이는 분을 봤다. 입장할 때는 건물입구를 관리하시는 경비 선생님을 봤고, 야외테라스에서는 회의중인 여러명의 관계자를 봤다. 공간 구석구석 둘러보며 사진찍는 사람들 중에 두 명 정도는 이 도서관 직원이 분명해 보였다. 누구에게든 달려가 책 반납을 부탁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기는 했다. 실은 예전에 다른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다가 자동반납기도, 시간 외 반납함도 없는 도서관 문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더니 경비 선생님이 자료실에 전달해주겠다고 책을 받아주신 적도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하는 마음으로 주차장으로 돌아와 더운 공기 속에서 내일의 동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혹시? 혹시? 하는 마음에 시동을 끄고 도서관으로 다시 가봤다. 누군가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천천히 입구를 지나 자료실 쪽으로 걸어가려는데 아까 봤던 물조리개를 든 선생님을 만났다. 눈이 마주쳤다. "책 반납하시려고요?" 내가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는데 나 같은 사람이 많은지 먼저 응대해주신다. "네, 연체라 기계로 반납이 안되더라고요." "네, 제가 해드릴게요. 대신 연체 기간만큼은 대출 정지되는 거 아시지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내일 어딜 가야해서 오기가.. (힘들었거든요)" 오 이렇게 기쁠수가.


번거로운 일을 처리해서 기쁘긴 한데 돌아오는 길에 이래도 괜찮은 거였을까 자문해봤다. 원칙과 규정이 있는데 그걸 어기고 자기 편할 대로 편의를 봐달라고 하는 사람은 나쁜 거잖아. 나는 규정대로 다음날 다시 와서 자료실에 직접 반납을 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직원분에게 예외로 나의 편의를 봐달라고 조른 셈이 된거고, 원칙대로 다음날 와야 했던 어떤 사람이 억울함을 느끼게 하는 행동을 한 건 아닐까. 몇주 전에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포장하면서 눅눅해지지 않도록 소스를 따로 포장해줄 수 없냐 물었다가 안된다는 답을 들었다. 작은 소스통을 따로 준비해갔었고 내가 보기에는 샌드위치 위에 쭉 짜서 뿌리는 소스를 왜 내가 가져온 통에 담아줄 수 없는지 의아했지만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규정이 있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왜 이게 안되냐고 따지며 고집을 부릴만한 사건은 아니었으니까. 그런 사람이야 말로 안되는 걸 되게 해달라고 억지를 부리는 진상 손님일 것이다. 나의 도서관 사례는 괜찮은 일이었겠지? 직원 선생님도 기꺼이 해주신다고 했고 크게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도 아니니까. 담당자의 재량 내지는 기분. 내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나는 늘 '안 됩니다' 하는 말을 들으면 안 되는 갑다 하고 돌아서는 사람인데, 누군가 자기는 왜 안되냐고 따지거나, 혹시 안될까요 부탁해서 되게 했다는 성공담을 들을 때면 사실 좀 기분이 나빴다. 내가 너무 고분고분해서, 화를 안 내서, 한 번 더 묻거나 도전해볼 용기가 없어서, 상대가 나를 우습게 보거나 함부로 대하고 있어서 나만 손해보는 걸까 하는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할 마음들이지만 쓰다보니 조금 명확해지긴 한다. 안 되는 걸 꼬치꼬치 따져들어서 되게 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조금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증거를 수집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인 사람인양 하고 싶지도 않다. 조금 손해를 보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닌 것에는 욕심 내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데 또 그렇게 따지지 않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하면, 세상의 부조리와 부정을 바로 잡으려고 꼬치꼬치 따지고 싸워야 할 때 가만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모든 말과 문장을 절대 진리로 세워놓고 꼭 지킨다, 안 지킨다 할 순 없는 거겠지. 나는 극단적으로 이거 아니면 저거를 정리해버리려는 나쁜 습성이 있는 것 같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그런 뜻은 아니잖아.


막연한 남의 말 말고, 내 생각과 행동의 지침이 되는 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도서관 연체도서 반납은 원래 기계로 하지만 비록 해당 업무중은 아니었지만 직원분이 해주신다고 했으니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그 행운에 감사하면 될 일이다. 만약 안된다고 했을 때 왜 안되냐고 직원 선생님께 따지지 않고 알겠습니다 하고 다음날 문 열렸을 때 찾아오면 된다. 아! 그 불편이 계속 거슬린다면 휴관일에도 연체도서를 반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달라고 도서관에 공식적으로 요청하면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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