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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dac Jun 19. 2023

경하! 월요일엔 유성온천

월19-6

한꺼번에 소화시키기 힘들만큼 좋은 일을 거푸 겪고 나면 마음이 들떠서 정신이 몽롱해진다. 오늘 아침이 그랬다. 6시 반에 잠에서 깼고 어제와 그제의 행복했던 순간이 떠올라 금새 심장이 쿵쿵 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일 또 신나는 일이 예정되어 있다. 이렇게 부풀어 오르다가 터져버리면 어떡하지? 기분 좋은 긴장이었지만 조금 편해져야 했다. 몸과 마음을 이완시킬 겸, 하고 싶었지만 바빠서 미뤄둔 ‘온천 방문’을 서둘렀다. (이완 맞…지?) 이부자리도 정리하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고, 재빨리 입을 수 있는 원피스를 걸치고 일어나자마자 유성으로 향했다. 차가운 물을 담을 보온병과 수분을 공급해줄 오이는 잊지 않았다. (정신 없는 와중에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도시락통에 담았다. 먹는 데 진심이라서…)


‘월요일엔 온천’에 다녀와서 ‘월간 유성 온천’을 유월부터 쓰겠노라 결심한 게 3주 전이다. 유성 호텔 온천에 처음 갔던 날, 온천이야말로 대전의 사랑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대전시 유성구는 일제 시대, 조선 시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백제 시대부터 유명한 온천 지역이라고 한다. D는 가까이 물 좋은 온천이 있는 게 얼마나 좋나며, 온천욕을 하면 무릎 통증을 비롯해 전반적으로 몸에 좋을 거라고 했다. 아, 나 온천 좋아하지. 깜빡 잊고 있었다. 좁은 집에 살 때도 빨간 고무다라이부터 플라스틱 욕조까지 꼬박꼬박 챙겨 욕조 목욕을 했다. 여행지에서도 근처에 온천이 있으면 꼭 찾아가는 편이었는데 대전에 살면서 유성 온천에 가볼 생각을 미처 못했다. 왜 이제 왔냐고 유성 온천이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쾅쾅쾅. 허겁지겁 문을 열고 온천탕에 풍덩 빠지니 온몸에 사랑이 퍼진다. 바로 이거다.


나에게 완주는 미가옥 삼례점이었다. 그 사랑을 이을 대전의 무언가를 찾아 다녔지만 매번 실패. 대전 콩나물국밥은 미가옥만 더욱 생각나게 할뿐이고, 나룻터식당의 콩나물탕은 훌륭했지만 내 사랑을 쏟아 붓기엔 부족했다. 다슬기 해장국인가 두부 두루치기인가 얼큰이 칼국수인가. 대전을 사랑하기 위해선 무엇을 만나야 할까? 딱히 마음을 붙잡는 음식이 없었다. (그렇다, 먹을 것만 떠올렸다.) 그런데 마침내.


유성 온천 지구엔 온천탕이 아주 많았고, 하나씩 다 방문해보고 싶은 마음에 유성구 문화관광과에 전화해 물어보니 따로 정리한 홍보지나 지도는 없다고 했다. 오호라, 그렇다면 내가 만들어야지. 때마침 기막힌 우연으로 ‘일제하 유성 온천의 개발과 대전 지역사회의 변화’라는 논문도 읽게 되었다. 이만하면 유성 온천이 운명처럼 다가온 게 아닌가. 서울 친구, 대전 친구, 유성구청 문화관광과에서 추천한 목록을 적당히 조합해 유성 호텔, 계룡 스파텔, 경하 호텔, 대온탕, 유성온천 불가마 사우나 등을 가보면 될 것 같다. 3주 전에 유성 호텔 대온천탕에 다녀왔는데 마음을 확 끌어당기는 매력은 부족했다. 답답하고 사람이 많았다. 아직 남은 온천이 많으니 괜찮다고, 아직은 유성 온천을 알아가는 중이라고 다독이며 다음을 기약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파바박 벼락 맞은 것처럼 경하 온천으로 달려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또한 운명이 아니었을까)


경하 온천에는 가로 3미터 세로 2미터 정도의 일반탕(수온 40도 정도)과 바로 옆에 일반탕의 1/3 정도 크기로 수온 45도 정도의 고온탕이 있었다. 탕 이름은 임의로 내가 붙였다. 온도계에 수온만 표시되어 있었다. 유성 호텔 대온천탕에 일반탕, 고온탕, 해초탕, 폭포탕 각 4개의 탕이 있었던 거 같은데 경하 온천은 딱 동네 목욕탕 크기 정도였다. 평일 오전이라 그랬겠지만 주말이나 휴일이라도 노후한 시설 때문인지 이용객도 많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한적함과 소박함이 너무 좋았다. 호텔 프론트에서 시내버스 회수권처럼 생긴 온천 입장권을 판매하고, 옛날 목욕탕에서나 줄 법한 플라스틱 번호표가 달린 사물함 열쇠를 준다. 오래된 건물이지만 프론트의 접객 태도는 호텔의 그것이어서 매우 정중하다. 온천탕으로 들어서면 정말 어릴 때 다니던 동네목욕탕이라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쓰다듬을 곳이 있다면 자꾸 쓰다듬고 싶어진다. 아마도 신발까지 넣을 수 있는 사물함이나 가운데 자리 잡은 평상?


목욕탕은 좁지만 사람이 적어서 한적하게 온천욕을 즐길 수 있었다. 플라스틱 썬베드가 놓여 있어서 탕에 몸을 담궜다가 물밖으로 나와서 좀 쉬다가 다시 탕으로 들어갔다가 하면서 한 시간 정도 온천욕을 즐겼다.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오려는 길에 목욕탕만큼 귀여운 ‘커피숍’을 보고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 다방이나 회장실에 있었을 법한 묵직한 소파에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며 어제의 일기를 썼다. 여기 너무 좋다, 나 지금 행복하다, 다음에 또 올 거다…. 마음의 안정을 얻으러 갔다가 더 흥분한 상태로 돌아오게 됐지만, 사랑의 시작은 그런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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