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우선쓰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adac Nov 17. 2023

선선해지고 바람 불고 눈 내리고

2023 예술인파견지원사업 - 예술로 (대전문화재단) 후기 05(끝)

드디어, 9월 25일 화요일의 가치봄 영화상영회 날이 되었다. 전시작품에 점자를 포함시키기로 하면서 뒤늦게 시각을 보완할 장치를 생각했다. 부족하지만 행사 홍보문안내문을 녹음해서 큐알코드로 연결되게 했다.


최근 출간된 몇몇 책에서 표지 디자인을 설명한 글을 본 적 있는데, 오디오 북 등으로 제작될 때 표지를 잘 전달하기 위해 작성되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하게 전시 이미지를 설명하는 음성 안내를 작성하고 싶었지만 너무 어려워서 배포용으로 작성한 안내문의 글자를 그대로 읽어서 직접 녹음하는 데 그쳤다. 그나마도 큐알코드로 연결되려면 어쨌든 보이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재생이 가능하다는 한계가 있는데, 처음이니까 할 수 있는 만큼을 시도해본다는 점에서 부끄러움과 민망함은 안고 우선 해보기로 했다.

벽과 유리에 붙은 모든 작업물은 시트지에 출력해 직접 붙인 거라 만져보면 글자와 이미지를 느낄 수는 있지만 그렇게 설명하면 나중에 억지로 붙인 해석이 될 것 같다.  처음부터 그 차이를 드러내고자 더 잘 만져지는 재료를 사용한다거나 감촉에 차이를 둔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 역시 처음이니까, 다음에 또 기회가 생긴다면 내용과 형식면에서 확장해서 작업을 이어갈 수 있기를. 벽에 붙은 ‘시트지 작품’중에 어디가 점자인지도 사실 보이지 않는 사람 입장에서는 알 수 없는 거 아닌가. 수어 들어가니까 점자도 넣자고 구색만 맞춘 정도에 그쳤다.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농인 관람객들은 사전 공연과 영화를 즐겁게 보고, 본인의 체험으로 완성된 작품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성황리에 행사는 끝났다. 행사명인 ‘선선해지고 바람 불고 눈 내리고’에서 ‘선선’이 무슨 뜻이냐 물어보는 분이 계셔서 무척 당황했다.농인들의 언어인 수어와 한국어가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제목부터 뭔가 어긋났다. 여러번 영상을 보면서 기억나는 대로 ‘시원하다’의 수어를 했는데 전혀 이해하지 못하셨다. 역시 내가 틀린 수어를 하고 있었다. 유튜브로 우리 행사 수어 영상을 보여드리자 그제야 알겠다고 하시면서 자리로 돌아가셨다.

댄스x국악 공연 중에도 우리가 의도한 것과 다른 상황이 발생했다. 계절의 변화를 소리북과 춤으로 표현하되 가사가 있는 노래가 아니니 간단한 문장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그를 현장에서 낭독하기로 했었다. 소리북의 진동과 댄서의 몸짓은 들리지 않는 사람에게도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간단하게’ 작성한 한국어 문장은 여전히 수어 통역이 필요한 청인의 언어였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간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가을이 오나 보다. 날이 점점 쌀쌀해진다. 바람은 차갑다. 가을의 끝은 쓸쓸하다.추위가 매섭다.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갔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다. 새가 노래하는 봄이다.”


공연 중간에 수어 통역 선생님이 자리에 일어나 내가 하는 말을, 그러니까 화면에 자막으로 뜨는 글을 통역하기 시작했다. 아, 한국어와 한국 수어의 차이를 들여다보는 전시를 준비한다고 하면서 바로 한발짝 옆에서는 의심도 고민도 없이 청인의 문장을 행사의 제목으로, 작품의 자막으로 사용했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이런 표현이 어떨까 농인 당사자에게 한번쯤 자문을 받아봤어도 좋을 뻔했다. 수어 통역 없이 자막으로만 나갈 문장이라면 직역 수어에 가까운 문장으로 표기하거나, 수어 통역을 병행하거나 하는 더 깊은 고민을 했어야 했다.


전시장에서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체험은 호응이 좋았다. 역시 조물 조물 뭔가를 만지는 감각, 아름다운 걸 만들어내는 성취감은 누구에게나 행복을 준다. 한국어와 한국 수어의 차이가 어쩌구하는 내 설명이나 전시장의 타이포 작품은 농인 관람객분들에게 큰 관심이 없어보였지만 행사날 이후에도 한 달 가까이 메가박스에 전시되었으니 오다가다 누구라도 들여다본 사람이 있었겠지. 최소한 준비하면서 나와 우리팀은 공부가 많이 되었다.


예술로 사업의 취지 중 하나는 예술인들이 사회와 만나는 계기를 마련하고 예술의 사회적 쓸모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예술인 개인에게는 안정적인 수입과 다른 장르 예술인과의 협업 및 네트워크, 작업의 확장이었겠지만 공적 자금으로 이루어지는 사업이니 사회적 의미를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술인 입장에서야 예술가의 존재, 예술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회적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에 대해서는 따로 길게 풀어야 할 테고, 나 역시도 지역사회나 공동체와 만나는 작업이 흥미롭고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올해의 예술로 사업은 참 좋았다. 팀워크도 좋았고, 작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타인을 이해하는 법, 혼자 말고 함께 사는 것, 예술이 할 수 있는 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의무, 동료 시민으로서의 연대 같은 것에 대해 생각해볼 계기가 되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은 건 6개월의 월급이었고.


매거진의 이전글 손으로 읽는 영화 명대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