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문고
애인은 다른 지역에 사는데 나를 만나러 매주 대전에 오고, 오면 늘 계룡문고에 간다. 급기야 주말 내내 머무는 동안엔 날마다 가자고 한다. 어제 갔잖아요. 자기 동네에서는 동네책방 여러 곳을 단골로 삼아 독서모임과 다양한 형태의 강연에 참여한다. 사고 싶은 책이 생기면 책과 어울리는 서점을 떠올리며 꼭 그 서점에 가서 산단다. 그래, 이런 사람이 책방을 해야겠지. 책을 사기는커녕 서점에도 잘 가지 않는 내가 아니라.
나는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도서관에서 빌려 보고, 없을 땐 희망도서로 신청한다. 책을 아주 가끔 사는데, 책방을 운영하는 친구네 놀러 갔을 때나 좋아하는 작가가 신간을 냈을 때, 재미있어 보이는 독립출판물이나 응원하고 싶은 출판사를 발견했을 때, 도서관에서 빌려 본 책을 갖고 싶을 때 정도다.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 이렇게 책을 잘 안 사도 되나 싶지만 책을 꽂아둘 곳도 없고, 읽지도 못할 책을 사서 쌓아두고만 싶지는 않다.
책과 책방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꽤 오래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는 자격지심을 갖고 살았다. 책을 좋아해서 밥값을 아껴 책을 사는 사람이고 싶은데 나는 책값이나 커피값, 택시비를 아까워하는 사람이니까.(부끄러운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이렇게 적고 나니 시원한 기분이 든다.) 지난주 미술관에 다녀온 이야기를 쓸 때도 느꼈지만 나는 내가 생각하는 ‘멋진 모습’을 여러 기준에서 가지고 있고 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많이 타박하는 편이다. 되고 싶은 멋진 모습이 여러 분야에서 막연히 많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에 빠져 지내는 독서가, 두껍고 어려운 인문서를 읽는 전문가, 동네책방 단골손님, 밝은 눈을 가진 서점주인, 유능한 편집자 따위가 책과 관련해 내가 되고 싶은 멋진 모습이다. 하하. 이렇게 적어보니 있어보이고자 하는 내 욕망이 너무 없어보여서 웃음이 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연습은 이런 부분에서도 효과가 조금 있다. 나는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지만 읽기에 게으른 내 모습을 인정하기로 한다. 서브웨이 샌드위치는 두 번 고민하고 사 먹지만 책은 서너번 더 고민하고 사는 내 모습도 그러려니 하기로 한다. 도서관에서 잔뜩 책을 빌려다가 고대로 반납하는 모습, 왠지 읽어야 할 것 같은 책을 펼쳤다가 무슨 말인지 몰라 포기하면서 언젠가 다음을 기약하는 모습. 정희진 선생님은 더이상 책을 읽지는 않고 모든 이가 자기글을 쓰고 책을 내고 싶어만 하는 시대를 비판했는데 그런 사람들이, 그러니까 나같은 사람들이 그나마 책도 읽고 책도 가끔 사는 게 나쁜 건 아니겠지. 그렇게 읽기 경험을 확장시켜가면서 독서세계가 확장될 것이다. 나는 자기 경험을 쓴 독립출판물도 재미있고 사사로운 개인의 이야기를 쓴 에세이가 좋더라.
계룡문고에 가는 게 싫지는 않다. 서점에서 데이트하는 연인은 내가 되고 싶은 멋진 모습 중에 하나니까. 그래도 순수한 마음으로 분야별 서가를 둘러보며 그날따라 눈에 들어오는 운명적인 책을 찾는 애인처럼 서점을 즐기지는 못할 것 같다. 같이 이런 저런 책을 들춰보며 농담을 하고 당신의 관심사와 취향을 엿보는 일이 재미있다. 그런 재미가 좀 덜하고 피곤한 날에는 어린이들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좌식공간에 누워서 쉬거나 곳곳에 놓인 의자에 앉아 가볍게 읽을만한 에세이를 들고 애인의 서점 탐험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서점은 책을 사는 곳이지 읽기만 하는 곳은 아니긴 한데, 동행이 방문할 때마다 책을 사니까 괜찮겠지. 그렇게 지난주말엔 두번이나 계룡문고에 갔고 계산대에서 왜 이렇게 행복해보이세요? 라는 질문을 받았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계룡문고는 행복을 주는 곳임에 틀림없다.
*매주 화요일 뉴스레터로 [소탐대전]을 받아보실 분은 여기에서 구독신청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