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도 전에, 스스로 실격처리를 하고 있진 않나요?

아무 것도 시작하지 못하는 병에 걸린 사람들을 위하여

by 비코토

글을 쓰기 위해 펜을 잡거나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려둔 순간, 멈칫하는 때가 있다. 이상하게도 그 짧은 공백이 늘어진 테이프처럼 줄줄 흘러내린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나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하다.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기준을 먼저 세우고,
거기에 닿지 못할 것 같으면 시작을 미룬다.

완벽주의라고 하면 거창하게 들리지만,
가만히 보면 누구에게나 비슷한 형태로 남아 있는 듯 하다.

다만 그 기준이, 생각보다 많은 걸 막아선다.

실컷 공부해서 JLPT N1을 따놓고도
일본인 앞에 서면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한 문장을 꺼내기 전,
머릿속에서는 이미 몇 번이나 고치고 다듬기를 반복한다.

이 표현이 맞는지,
이 단어가 자연스러운지.

겨우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생각해둔 것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수준.

유치원생처럼 더듬거리며 단어만 이어 붙이고 만다.

그 순간을 지나고 나면,
항상 같은 생각이 남는다.

왜 또, 생각만큼 못 했을까.

SNS에서 본 광고 하나에 들떠
스케치북에 아크릴용 붓과 물감, 거치대까지 사두기도 했다.

책상 위에는 준비된 것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데,
붓은 물감이 묻지 않은 상태로 깨끗하다.

영상도 마찬가지다.

편집 프로그램은 매달 결제하고,
영상은 쌓일 만큼 찍어두고도
막상 편집은 차일피일 미뤄진다.

준비는 늘 끝나 있는데,
시작만 빠져 있다.

돌이켜보면 이상한 구조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시간이 없어서도 아니다.

시작하기 전에,
이미 한 번 스스로를 걸러낸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오는 순간,
그 다음부터는 모든 시도가 시험처럼 느껴진다.

통과하지 못할 것 같으면,
애초에 시도하지 않는다.

시작 전 이미 탈락이다.

그래서 방식을 조금 바꿔봤다.
생각보다 먼저 움직여보기로 했다.

눈 딱 감고, 500자만 써보기로 했다.
이상하게도 500자가 1000자가 되고,
1000자가 2000자가 됐다.

문장이 어색해도 그냥 두었고,
엉망 같아 보여도 멈추지 않았다.

막상 그렇게 해보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 번 움직이고 나니,
그 다음은 조금 덜 버거웠다.

자기검열의 사슬을 끊고
손이 가는 대로, 입이 가는 대로 해보기로 한다.

틀려도 된다.
아니, 틀려야 한다.

틀려야만 의미가 생긴다.
틀리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완벽한 시작은 없다.
시작 전 탈락만 있을 뿐이다.

지금 머릿속의 필터링에 걸려
끝내 내려오지 못한 것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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