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다시 펜을 잡았다, 창조 아닌 창조로

소설을 내려놓고, 다른 방식으로 쓰기 시작한 이야기

by 비코토

아침 7시, 회사 근처 카페에 들어가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이른 시간이지만 출근하는 사람들이 커피를 픽업하는 소리에 다소 왁자지껄하다.

그 소란 속에서 나는 테이블 하나의 작은 공간에 홀로 존재한다. 차가운 커피 잔을 든 순간 손끝이 먼저 잠에서 깨어난다. 쓴맛이 입 안에 감돌고, 아무 말도 쓰지 않은 종이가 앞에 있다.

어렸을 때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시는 엄마를 따라 나도 작가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앞에 붙이고 싶었다.

그래서 흰 종이를 앞에 두고 오래 앉아 있었다. 문장을 쓰고 지우는 일이 반복됐다. 한 줄을 쓰면, 그다음 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읽고, 고치고, 결국 지웠다.

어느 순간부터는 쓰는 시간보다 고치는 시간이 길어졌다. 더 나아지기보다는, 남는 게 사라지는 쪽에 가까웠다. 결국 펜을 내려놓았다. 쓰는 게 그저 재밌어 시작했는데, 그 감정은 어디론가 날아가버리고, 남은 건 괴로움 뿐이었다.

그 뒤로 20년이 흘렀다. 종이를 완전히 버린 건 아니지만, 오래 붙잡지도 않았다. 대신 다른 것들을 더 많이 봤다. 길에서 스친 장면들, 사람들의 말투와 생각,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간 문장들. 따로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머릿속 한 켠에는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다시 펜을 잡은 건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가 아니다. 문득 내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무언가를 만들어내려 하기보다는, 보이고 느낀 것들을 그대로 두고 싶었다.

요즘은 쓰는 방식이 퍽 다르다. 처음부터 만들지 않는다. 이미 있는 것에서 시작한다. 좋아했던 문장, 누군가 무심코 던진 말, 길을 걷다 떠오른 생각. 그것들을 가져와 순서를 바꾸고, 조금 덜어내고, 내 호흡에 맞춘다.

고단한 몸으로 집으로 향하던 금요일 밤이 떠오른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울려오는, 감정이 가득 담긴 가사들. 하나같이 건조하고 피로한 얼굴들. 규칙적으로 덜커덩거리는 전철의 안온한 선율.

전부 옮기지 않고 몇 가지만 남긴다. 남긴 것들이 오히려 더 오래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손가락이 휴대폰 자판을 두드린다. 리듬이 생기다가 끊기고, 다시 자라남을 반복한다. 예전 같으면 그 빈칸을 채우려고 했을 텐데, 지금은 그냥 둔다. 이어지지 않는 문장도 그대로 둔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읽어본다. 크게 달라진 건 없는데, 처음보다 어색함이 덜하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 조금 늘어난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낀다.

이게 창조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완전히 새로 만든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그대로 옮긴 것도 아니다. 다만 예전처럼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상태는 아니다. 그렇게 한 자 한 자 써내려가고 있다. 여전히 어렵지만, 약간의 대담함을 얹어서.

가끔은 생각한다. 언젠가 다시 소설을 쓰게 된다면, 이야기를 크게 만들지는 않을 것 같다. 읽다가 잠깐 멈추게 되는 장면 하나면 충분하리라.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남는 문장.

지금은 그 전 단계에 있는 것 같다. 보이는 것들을 조금씩 옮기고, 남길 것만 남기고 있다.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는 선에서.

그렇게 쌓인 문장들 사이에서, 예전에는 없던 방식의 글이 만들어져 나가는 감각이 생소하지만 또 신선하다. 루틴으로 가득찬 약간은 건조한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되는 종류의 것.

아마 나는 그걸 계속 쓰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어떤 계기로 펜을 잡게 되었나요?

매거진의 이전글출발도 전에, 스스로 실격처리를 하고 있진 않나요?